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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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수천개 도장 존재의 흔적, 역사가 되고 초상이 되다

재개발 지역 폐가에 버려진 막도장 접하고 묘한 감정 생겨 작업 / 금·돌·나무 등에 조각 후 인주·잉크 발라 찍어 완성 / 참신한 소재·명상 분위기 외국 컬렉터에 호평 받아 / 6월부터 뉴욕서 개인전
흔히 도장으로 불리는 인장을 붓 삼아 그림을 그리는 작가. ‘인장회화’ 작가로 불리는 이관우(48)가 주인공이다. 화폭을 점, 선, 면 대신 도장으로 채워간다. 원래 인장(印章)은 금, 은, 옥, 수정이나 돌, 나무, 뿔, 뼈 등에 글씨·그림·문양 등을 조각(전각)하여 인주나 잉크를 발라 찍어 개인이나 집단을 증명해 주는 신물(信物)이다. 작가는 인장이 조각과 서예가 하나로 결합한 예술 표현의 한 가지 양식이란 점에 주목했다. 서예와 조각의 융합인 것이다. 다시 이를 그림에 접목하고 있으니 융합 중의 융합이라 하겠다. 인장을 모아 만들어 낸 풍경은 하늘에서 본 땅의 풍경 같기도 하고,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 등 행성의 풍경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때론 우주 블랙홀과 사람이 꿈틀거리기도 한다. 옛 성곽의 모습도 있다.

“제 작품은 우연에서 탄생합니다. 워낙 많은 전각들을 사용하다보니 설사 의도적으로 사용한다 해도 의도하지 않은 결과물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절대 비슷한 작품을 돌출해 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모든 표현들이 가능하다는 얘기이기도 하지요. 미완성된 도장이든 완성된 도장이든 제 작업에서는 서로에게 역할이 되어줍니다. 하나하나가 모여 거대한 산이 되기도 하고 강을 이루기도 하고 도시가 되기도 하여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이 되기도 합니다. 도장은 저에게 물감을 대신합니다.”
인장회화 몰입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난다는 이관우 작가. 그는 최근 뉴욕 등지에서 명상적 작품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개미들이 매일매일 무언가를 열심히 나르듯이 전각을 하고 쌓는다. 그러다 보면 그 안에 거대한 성이 생기기도 하고 무한한 공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인장회화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인장회화의 계기는 주변 재개발 예정지의 폐가에서 보게 된 버려진 ‘막도장’들입니다. 가장 값싸게 나무로 만든 인장들이었지만 저에겐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인장은 생명력과 직결된 존재의 흔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인장은 사물이면서 하나의 인간을 상징하는 아주 작은 그림이었어요.”

전각의 칼끝에 온 힘을 집중하다보면 어느덧 무아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가 인장이 되고 인장이 자신이 되는 혼연일체의 경지다. 어렴풋하게 그 속에서 생명, 만물들이 스케치처럼 스친다. 그럴 땐 도장들을 손 가는 대로 화판에 붙여나간다.

“주객이 일체가 되고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가 공존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할머니 초상
그는 초기엔 수많은 목도장을 화판에 붙여갔지만 요즘엔 도장을 레진으로 캐스팅해 화판에 촘촘히 붙여간다. 생명의 세포분열을 연상시킨다.

“울창한 생명의 숲으로 들어서는 것 같아요. 인장을 쌓아가다 보면 밀림 속 피라미드에 이르게 되는 명상체험을 하게 됩니다. 비로소 세상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통찰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요.”

삶의 정글에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는 파란 눈의 세계적인 명상스님 아잔브람의 글을 만나게 된다.

“고통은 삶이 결코 줄 수 없는 것을 삶에서 기대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삶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면 고통이 되는 것이지요. 아잔브람 스님은 ‘삶의 한계와 자기 능력의 한계를 이해할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주변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힘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생로병사마저도 속성으로 받아들이고 조화를 이루는 것뿐입니다.”

그는 인장을 집적해 마음의 파라미드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조화, 자애, 행복, 평화 등의 중도에 이르게 되리라 믿는다. 작가는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1999년부터 물감 대신 도장으로 작업을 해 오고 있다. 도장의 모양은 사각형, 원형, 타원형 등 제각각이다. 작가는 이것들을 모아 부처나 할머니 얼굴 등 구상화를 그릴 뿐 아니라 명상적인 추상화까지 이뤄낸다. 낱낱의 도장은 각각 이름을 나타내는 작은 그림이지만 그것들이 모여 구성된 화면은 마치 개인이 모여 만든 새로운 사회처럼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도장이라는 재료에 각각의 개인사가 서려 있으니 수백, 수천개의 도장으로 만든 풍경은 역사의 풍경이 되고, 인물화는 시대의 초상으로 읽힌다.

그의 작품은 인장이라는 동양적 소재의 참신성 때문에 굵직한 해외 아트페어를 통해 국내보다 외국 컬렉터에게 먼저 호평을 받았다. 한국현대미술의 간판 스타로 부각된 ‘단색화’처럼 구도자 같은 반복행위에서 오는 수행적, 명상적 분위기 또한 높은 평가의 한 요인이 됐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현대미술의 심장부인 뉴욕 첼시에 위치한 에이블파인아트갤러리가 6월 1일부터 15일까지 그의 개인전을 연다. 2011년에 이어 두 번째다.

지난달 25일 뉴욕에서 개막한 ‘아트엑스포 뉴욕’에서는 이관우의 150호 대작이 미국인 컬렉터의 품에 안겼다. 한국과의 인연이나 이관우 작가에 대한 사전지식도 없는 순수한 애호가였기에 작가는 더욱 기뻤다. 32년 전통의 ‘아트엑스포 뉴욕’은 500개 이상의 화랑이 참여하는 대규모 아트페어로, 이 작가가 처음 출품한 3점 모두 현지 컬렉터에게 팔리는 쾌거를 이뤘다.

그의 작품 불상은 붓다의 담담한 사유 형상을 담고 있다. 깨달은 자의 초연한 침잠과 평안이 감돈다. 붓다의 편안한 미소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생명의 장중함과 엄숙 경건함이 느껴진다. 고향집 할머니 초상의 벌어진 입은 행복 그 자체다. 노인의 형상에서 생명의 누적과 관조가 흘러넘친다. 생명에 대한 경외와 감동, 조모에 대한 경배(보답)도 어른거린다.

그는 요즘 스스로 행복에 겹다고 털어 놓는다. 작가로서 작업을 지속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은 고통스러운 두 시점 사이의 휴지기(休止期)임을 안다. 그의 작업실 한편에 아잔브람의 글귀가 적혀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당신이 즐거움의 정체를 깊이 들여다본다면 그것이 고통스러운 두 시점 사이의 휴지기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이유는 그 전에 몇 시간 동안 먹지 않았고 앞으로 몇 시간 동안 먹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배를 채운다면 음식을 즐기기는커녕 맛도 모르게 될 것이다. 당신은 앞으로 고통이 올 것임을 알고 있을 때만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므로 영원히 행복만 지속되는 천국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완벽하고 궁극적인 만족감 같은 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가 다시금 전각 칼을 들고 인장을 만들어 간다. 지금 여기에 이렇게 할 수 있는 모습이 행복이라 했다. 예사롭지 않은 울림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