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인지 요즘 그림이나 피아노, 태권도 등을 다시 배우는 어른이 늘고 있단다. 유년 시절에 대한 향수도 있지만 어른다워야 한다는 통념을 거부하고픈 어른의 욕망을 대변하는 듯하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성인의 이런 예능 학원 수강자가 2013년 4만2462명에서 2016년에는 19만3258명으로 급증했다니, ‘아이 같은 어른’을 지칭하는 ‘키덜트(kidult)’ 문화가 유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패션에서도 미키마우스나 백설공주, 미녀와 야수 등 동화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원용한 옷을 어른도 과감하게 사서 입기도 한다. 다시 생긴 오락실에서 옛날에 유행했던 게임에 몰두하는 어른도 많단다. 이전 같았으면 유치하거나 철이 없다고 핀잔받을 수도 있었던 일들이다.
사실 중세에는 어른과 아이의 구분 자체가 모호하기도 했다. 필립 아리에스의 책 ‘아동의 탄생’에서 소개하는 중세의 그림을 보면 아이들이 ‘축소된 어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마치 난쟁이처럼 다른 특징은 어른과 유사한 반면 단지 키와 체력에서만 어른과 다르게 표현된다. 영아사망률이 높아 아동기에 대한 관심이 적었기에 이유(離乳)가 끝난 아이는 곧장 공동체 생활을 하며 어른의 동반자가 됐다. 그러다가 근대적 의미의 가족과 학교 교육의 개념이 출현하면서 아이와 어른의 분리가 생겨났고, 이로 인해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성 또한 후퇴했다는 것이다. 근대 개인주의 신화로 인해 아동의 개념 자체가 역사적으로 ‘발명’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 |
물론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곧바로 아이로 영원히 살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어쩌다’ 어른이 돼버린 어른이 ‘제대로’ 어른이 되기 위해 뒤늦게 성장통을 겪는 것일 수도 있다. ‘어른 같은 아이’보다는 ‘아이 같은 어른’이 많은 사회가 더 건강하지만, ‘아이 같은 아이’와 ‘어른 같은 어른’이 서로 관계를 맺는 사회가 더욱더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아이는 아이처럼 살 필요가 없다. 이미 아이니까. 어른만이 아이처럼 살기를 꿈꾼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으로 살아보지 못했지만, 어른은 아이로도 살아보았다. 그래서 어른인 것이다. 이 때문에 평균 수명이 늘어 만약 100세까지 산다면 아이로 길게 사는 것보다는 어른으로 오래 사는 것이 더 풍요로울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몇 살의 어른으로 살고 싶은가. 어른스러운 선택이 필요하다.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