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구엘은 어린 나이지만 사후 세계를 탐험하면서까지 음악을 향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음악이 곧 행복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반대나 죽음에 대한 공포도 그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다. 금기시되었던 음악을 통해 결국에는 가족 간의 화해와 용서에 이르는 음악영화이자 가족영화이며 성장영화이기까지 한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신나는 멕시코 음악의 매력이나 실사영화보다도 아름다운 영상 때문에 영화 자체의 예술성에 감탄하게 된다.
하지만 ‘코코’와 정반대되는 스타일의 영화가 바로 ‘패터슨’이다. 대중적 애니메이션 영화인 ‘코코’와 예술가들 특히 시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예술영화 ‘패터슨’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나 연출 방식이 사뭇 다른 것도 사실이다. ‘코코’가 ‘일상의 예술화’에 가깝다면, ‘패터슨’은 ‘예술의 일상화’를 추구한다. ‘코코’를 통해 예술로 승화된 일상을 경험할 수 있다면, ‘패터슨’이 중시하는 것은 일상으로 승화된 예술인 듯하다. 예술과 일상에 방점을 각각 다르게 찍는다는 것이다.
영화 제목인 ‘패터슨’은 미국의 작은 도시 이름이자, 그 지역 출신인 시인의 시집 제목이며, 영화 속 남자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패터슨은 패터슨이기에 패터슨을 벗어날 수 없다. 영화 속 시간은 월요일에서 시작해 다시 돌아오는 월요일에 끝난다. 그 일주일 동안 패터슨은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난 후 출근해서 정해진 노선대로 버스를 운행한다. 기르는 개와의 밤 산책과 단골 바에서의 맥주 한잔도 거르지 않는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근소한 차이의 기상 시간과 일어나기 직전의 잠자리 자세, 버스에서 만나는 승객들의 대화 정도이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며 패터슨은 매일 시를 쓴다.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친다. 대단한 소재나 엄청난 각성을 대상으로 하지도 않는다. 확성기 모양의 그림이 그려진 성냥갑이나 잠자는 아내의 얼굴, 흔하게 내리는 비나 동네에 있는 조그마한 폭포가 그의 시에 담겨진다. 죽음에 대해 쓸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죽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래서 그냥 비유일 뿐이다. 사랑에 대한 시를 쓰지만, 그것 또한 영화 속에서 짝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꺼내 든 가짜 총일 수 있다.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이니까.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 |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현실을 중시해야 우리 모두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예술지상주의를 예술우선주의가 아닌 예술일상주의로 바꾸어 버린 패터슨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예술가가 외계인이 아닌 이웃사람으로 존재할 때 가능한 예술이기도 하다. 옆집에 사는 사람이 패터슨이고, 자기 자신도 이웃사람의 패터슨이 된다면 그것이 진정한 예술 사회가 아닐까. 예술은 이토록 우리 가까이에 있다. 멀리 있다면 이미 죽은 예술일 테니까.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