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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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안하니?", "결혼 안하니?" 오지랖에 '명절포비아'

#1. “그냥 관심 좀 꺼주시면 안 될까요”
서울에서 취업준비생 3년차를 맞은 한모(29)씨는 올해 설에 이어 추석에도 고향집 대구에 내려가지 않을 생각이다. 한씨 아버지가 7남매 중 장남이다 보니 한씨의 고향집에는 명절마다 친척들이 모인다. 지난해 추석 때 고향집에 내려갔던 한씨는 친척 어른들의 “취업은 언제 할거니?”, “그럴바엔 공무원 준비하는 게 낫지 않니”, “내 친구 아들 취업 비결을 들어보니...” 등의 말에 진절머리가 났다. 한씨는 “그들에겐 일 년에 한 두 번 보는 조카가 걱정되서 하는 말이겠지만, 처지가 처지인지라 내겐 그저 오지랖으로 느껴진다”면서 “부모님껜 죄송하지만, 이번 추석도 패스다. 친척들의 잔소리나 오지랖 섞인 말을 들을 바엔 혼밥, 혼술을 하더라도 서울에 있는 게 낫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2. “내 결혼 유무가 그들의 가십거리 되는 게 싫네요”
회사원 김모(34·여)씨는 명절이 다가오는 게 스트레스다. 명절 때 고향 부산에 내려가면 친척들의 “결혼 안하니?”, “지금 애 낳아도 늦다” 등의 잔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친척 어른들은 이미 아이 2명을 출산한 김씨의 사촌동생을 가리키며 “여자는 저렇게 사는 행복이다”, “부모님 생각은 안하니” 등 비교까지 하기도 한다. 김씨는 “비혼 선언까지는 아니어도 결혼 생각이 딱히 없는데, 주변 친척 어른들은 ‘여자는 결혼해서 애를 낳아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면서 “이번 추석엔 고향집에 내려가지 않을 명분을 만들기 위해 명절 당직을 자청했다”라고 말했다.


매년 설, 추석 등 두 차례 돌아오는 ‘명절 오지랖’은 취업준비생이나 30대 미혼남녀들에게 큰 스트레스가 된 지 오래다. 친척 어른들 딴에는 그 오지랖은 애정과 관심이라 항변하지만, 취준생들과 미혼남녀들에겐 그저 잔소리이자 오지랖일 뿐이다.

아르바이트 포털 알바몬이 추석을 앞두고 대학생 및 취준생, 직장인 등 성인남녀 2229명을 대상으로 ‘추석 스트레스’를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46.7%는 ‘올 추석 친지 모임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응답군별로 취준생이 52.8%로 직장인(44.8%), 대학생(36.2%)과 비교해 크게 높게 나타났다. 혼인 여부에 따라 살펴보면 미혼이 49.4%로 기혼(24.9%)의 약 두 배에 달한 것도 특징이었다.

추석 친지모임에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복수 응답 가능)로는 ‘친지들과의 만남이 불편하고 부담스러워서(43.8%)’가 1위에 꼽혔다. 2위는 ‘현재 나의 상황이 자랑스럽지 못해서(35.3%)’가 차지한 가운데 ‘평소 친척들과 왕래가 없어서(21.1%)’, ‘혼자 쉬려고(20.2%)’가 나란히 3, 4위를 차지했다. 이밖에도 ‘취업(이직) 준비를 하려고(18.4%)’, ‘여행, 취미생활 등 개인적인 휴가 계획이 있어서(8.4%)’ 등의 이유도 이었다.
실제로 상당수의 성인남녀가 추석 가족모임 후 불편과 후회를 겪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알바몬이 설문에 참여한 응답자 중 지난 해 추석에 친지 모임에 참석했었다고 답한 62.3%에게 친지모임 참석 후 이를 후회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이들이 명절 친지 모임에 참석한 것을 후회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친척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됐다. 알바몬이 복수응답으로 그 이유를 응답 받은 결과 '덕담을 가장한 친척어른들의 잔소리와 참견(53.8%)'이 2위와 24%P가 넘는 큰 차이를 기록하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또 '주머니 사정으로 넉넉히 챙기지 못한 용돈과 선물(29.3%)' 때문에 후회했다는 응답이 2위를 차지한 가운데 '겉도는 대화 등 부담스럽거나 친밀하지 못한 친지들의 관계(22.2%)', '제사음식 준비, 거지 등 너무 많은 일거리(15.1%)', '진이 빠지는 귀성/귀향길 정체(14.1%)'가 차례로 5위 안에 꼽혔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다툼(13.0%)', '예전 같지 않은 부모님, 친지의 모습에 효도할 걸 하는 후회(11.5%)', '친지들 앞에서의 말이나 행동 실수(3.7%)' 등도 명절 친지 모임에 참석한 것을 후회하게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커플 매칭 전문 기업이 직장인 남녀 1777명을 대상으로 추석 계획을 물은 결과 집에서 혼자 휴식을 취하겠다는 응답이 39.2%로 가장 많았다. 이어 일(17.6%), 여행(15.3%), 이성과 데이트, 취미 생활을 즐기겠다는 응답이 나왔다. 추석 연휴 가족과 함께 보내겠다는 응답은 절반도 안 되는 23.4%에 그쳤다. 이들은 가족과 함께하지 않기로 한 이유로 ‘이성 교제·결혼 질문이 듣기 싫다’고 가장 큰 비율은 68%를 차지했고, 연봉·추석상여금 질문, 직장에 관한 질문이 괴롭다고 말했다.
사진=파고다 학원 제공.

주변 친척들의 오지랖에 지친 이들이 고향집에 내려가지 않으면서 카페나 어학 학원, 숙박업소 등을 ‘명절대피소’라는 별칭으로 일컫기도 한다. 파고다어학원은 2015년 추석 연휴 기간부터 학원 일부를 개방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있다. ‘비상식량’이란 명목으로 간식과 음료도 제공한다. 어학시험 점수가 필요한 취준생이나 자기계발을 하려는 직장인들이 찾는다. 공간서비스 그룹 토즈는 연휴 기간에 일정 금액을 내면 음료를 무제한 제공하는 명절대피소를 운영한다.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청년층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책방, 주점, 숙박업소 등 다양한 업종으로 확산하고 있다. 직장인 중에는 회사 당직근무를 ‘웃돈’을 주고서라도 당직근무를 서겠다는 이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커뮤니티 갈무리.

매년 명절마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화제가 되는 명절 ‘잔소리메뉴판’도 신풍속도의 일환이다. 이 메뉴판에는 진학을 앞둔 청소년의 경우 성적과 대입, 대학생은 취업, 직장인은 결혼과 출산 등 어른들의 오지랖을 들을 가능성이 있는 항목별로 5만∼50만원까지 다양한 가격이 책정돼 있다. 잔소리를 하려면 그에 맞는 돈을 지불하고 하라는 것이다. 5만원으로는 학생들에게 ‘모의고사는 몇 등급 나오니?’와 ‘대학 어디 어디 지원할 거니?’ 등을 물을 수 있다. 10만원으로는 ‘살 좀 빼야 인물이 살겠다’ 같은 말을, 15만원으로는 ‘취업 준비는 아직도 하고 있니?’란 질문 등을 할 수 있다. 직장인을 상대로는 가격이 더 올라간다. 30만원을 줘야 ‘나이가 몇인데 슬슬 결혼해야지’라고 할 수 있고, ‘너희 아기 가질 때 되지 않았니?’라고 물으려면 무려 50만원을 지불해야 한다. 이 같은 명절 신풍속도를 두고 “재밌다”는 반응과 “오죽했으면 이런 게 생겼겠느냐”는 자조가 교차한다.

남정훈 기자 che@segye.com
사진=게티이미지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