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유전무죄 무전유죄…법 지키면 손해인 대한민국? [김현주의 일상 톡톡]

우리는 흔히 법을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부릅니다.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는 마땅히 지켜야 한다는 기준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해 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법을 잘 지킨다는 것은 당연히 해야만 하는 과제와 다름 없습니다. 더욱이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변화 속에 법에 대한 의존성도 커져가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준법정신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법을 지키면 '손해'라는 인식도 강합니다.

다만 이런 현상의 원인을 그저 시민의식 부재 때문이라고만 치부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우리사회의 준법정신이 부족한 원인을 좇다 보면 법에 대한 불신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 이면에는 법이 힘을 가진 자들의 편에 서 있다는 의심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평가되는 양형 기준에 대한 문제제기도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전체 21.8%만이 “우리사회는 법이 잘 지켜지는 편”이라고 응답했다.

70.9%는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법은 지켜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18.6%만이 “권리를 침해 당했을 때 법이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10명 중 9명은 “여전히 우리나라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사회”라고 밝혔다.

“법대로 살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64.6%)도 많이 했다.

개정이 시급한 법으로는 성폭력처벌법을 가장 많이 꼽았다.

청소년처벌법, 아동학대처벌법 개정 필요성을 외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우리나라의 법(法)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을 살펴본 결과 법에 대한 신뢰가 크게 무너져 있었으며, 법이 시대의 변화를 뒤따라 가지 못한다는 지적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먼저 한국사회는 준법정신이 부족한 사회라는 인식이 강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체 10명 중 2명(21.8%)만이 우리사회는 법이 잘 지켜지고 있는 편이라고 바라봤을 뿐이다. 오히려 법이 잘 지켜지지 않는 편이라는 인식(38.8%)이 훨씬 뚜렷한 모습으로, 젊은 층일수록 한국사회는 준법정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법이 제대로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법이 약자보다는 강자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52.8%·중복응답)는 지적을 가장 많이 했다. 법이 ‘권력’의 영향을 받고(44.3%), 돈이 있는 사람들은 ‘돈’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39.9%)는 인식이 사회전반에 팽배한 것이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법 집행이 많아지고 있고(31.4%), 사회적 약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면이 강하다(28.9%)는 점도 한국사회에서 법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들이었다.

◆"권리 침해 당했을 때 법이 나를 보호해줄 것" 18.6%만 동의

반드시 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법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인식도 상당히 팽배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먼저 ‘준법정신’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큰 편이었다. 전체 10명 중 7명(70.9%)이 나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법’은 지켜야 한다고 바라보는 것으로, 특히 연령이 높을수록 준법정신을 많이 강조했다.

2명 중 1명(52.1%)은 스스로 법을 잘 지켜야만 법의 보호를 받을 수가 있다는 생각도 내비쳤다. 하지만 정작 법은 국민 개개인을 잘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바라보는 시각이 강했다. 자신의 권리가 침해 당했을 때 법을 통해 해결을 할 수 있고(22.7%), 법이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18.6%) 믿는 사람들이 10명 중 2명에 불과했으며, 위험에 빠지거나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23.3%)는 기대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만큼 법에 의해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기본적인 신뢰가 약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법이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준다는 믿음(35.7%)도 적은 편이었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법이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는 태도가 강해 보였다.

법이 국민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의 반대편에서는 법이 권력과 돈 앞에서만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는 목소리가 들끓고 있었다. 전체 10명 중 9명(88.8%)이 여전히 한국사회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회라는데 공감을 했으며, 법보다는 주먹이나 돈의 힘이 더 세다고 바라보는 시각도 64.7%에 이른 것이다. 전체 응답자의 85.8%가 권력자들은 법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바라보기도 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권력자들은 준법의식이 강하다는 인식(5.7%)은 찾아보기가 어려워, 돈과 권력 같은 ‘힘’을 가진 사람들이 법을 악용하고 있다는 의심이 상당히 크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법에 대한 불신이 전반적으로 강한 만큼 법을 지키는 사람만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3명 중 2명 "법대로 살면 손해 보는 세상"

국민 다수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시대의 흐름 및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는 일부 법들의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94%)이 필요하다면 법은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서 개정(폐지·시행 포함)이 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뜻을 함께 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법은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집행되어야 하고(94.3%), 법 집행이 국민 모두가 공감하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뤄져야(88.2%) 하지만, 현재 우리사회의 법 집행은 국민들의 공감과 상식에서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보여진다. 10명 중 8명이 법의 적용과 집행의 과정에서 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아지는 것 같고(80.6%), 요즘 법적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77%)고 말하고 있을 정도였다.

국민들의 공감과 상식에서 동떨어진 법 집행의 대표적인 예로는 음주상태에서의 범죄에 대한 형벌을 감형하는 ‘주취감형’을 꼽을 수 있었다. 전체 응답자의 90.5%가 음주상태에 의한 범죄 중 ‘심신미약’은 면죄사유가 될 수 없다는데 동의하는 것으로, 연령에 관계 없이 음주상태에서 벌어진 범죄행위라는 이유로 솜방망이 처벌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똑같았다.

무지에 의해 어떤 범죄행위를 저질렀다고 해도 그것을 면죄사유로 봐서는 안 된다(77.3%)는 의견도 많았으며, 최근 급증하는 청소년 범죄를 염두에 둔 듯 현재 우리나라의 법이 청소년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다(90.5%)고 바라보는 시각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주장들은 성별과 연령에 관계 없이 거의 모두가 공감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법이 다른 외국의 사례처럼 더욱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의견(93.7%)에 힘을 실어준다.

◆90.5% "음주상태에 의한 심신미약 면죄사유 될 수 없다"

실제 최근 다양한 법률 조항의 개정안(폐지 및 시행도 포함)이 국회 및 정부에서 논의되거나, 개정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높은 것으로 보여졌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법률 개정 내용은 이미 개정된 근로시간 단축개정법(90.3%·인지율)과 부정청탁금지법(83.6%)이었다. 성폭력처벌법(77.4%)과 청소년보호법(74.4%), 선거연령법(74%), 낙태죄(73.7%), 종교인과세법(73.2%), 동물보호법(65.9%)의 개정 및 폐지에 대한 논의도 많이 인지하고 있었다.

특히 이 중에서도 개정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폭력처벌법(59%·중복응답)으로, 꾸준히 증가하는 성폭력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각종 청소년 범죄가 증가함에 따라 그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청소년보호법’(48.3%),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강화할 필요가 있는 ‘아동학대 처벌법’(48.1%), 음주상태의 범죄에 대한 형벌을 감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맞물려 있는 ‘주취감형’(43.3%)의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상당히 많았다. 그밖에 부동산법(24.9%)과 정치자금법(23.1%), 사형제도(21.6%)의 개정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뒤를 이었다.

최근 청소년범죄의 증가와 함께 사회적인 논의가 대두되고 있는 청소년보호법 개정은 ‘형사 처벌 연령’ 조정이 가장 큰 핵심인데, 전체 응답자의 82.4%가 현행 ‘14세’보다 하향조정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현재 14세인 형사 처벌 연령이 적정한 나이인 것 같다는 의견은 12.4%에 그쳤으며, 오히려 형사 처벌 연령을 상향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5.2%)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보다 어린 청소년들에게도 범죄의 형량을 똑같이 매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청소년범죄에 대한 우려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형사 처벌 연령의 하향조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나이를 10세(26.9%), 12세(20.3%), 11세(10.2%), 13세(9%) 순으로 꼽았다.

◆"인간 대신해 로봇이 판결 내린다고?"

한편 인공지능(AI) 기술의 확산과 사법 불신 등으로 AI 판사의 인간 판사 대체 가능성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AI는 이미 일상생활을 파고들었다. 운전자가 차량을 조작하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등장했고, AI가 그린 그림이 뉴욕 크리스티경매소에 등장했고 AI가 만든 음악과 소설까지 나왔다.

법조계도 AI의 영향권에 들어왔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미국 위스콘신주 대법원은 AI 알고리즘 자료를 근거로 형사 재판 피고인에게 중형을 선고한 하급 법원의 판결이 '타당하다'고 인정했다.

한국 대법원은 2021년 시행을 목표로 빅데이터 기반의 지능형 차세대 전자소송 시스템 구축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인공지능 소송 도우미 등도 개발할 계획이다. 앞서 유동균 판사는 지난 9월6월 열린 'AI와 법률시장의 미래' 심포지엄에서 "법원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데이터를 AI 기술로 처리할 수 있으면 법관 업무가 경감된다"며 "이를 통해 법관이 법정에서 더 충실하게 재판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분간 AI가 판사를 대체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비슷한 판례를 검색하는 기계학습기법을 이용해 AI가 판사처럼 결론을 내릴 수 있지만, 최종판단은 사람의 몫이라는 것이다.

법조계 한 전문가는 "인간은 정량화를 하지 않고 결정, 판단을 할 수 있지만 인공지능은 수치로 표현한다"며 "그 수치가 오류가 날 수도 있고, 그 안에 도덕적이고 감정적인 가치 판단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기술을 통한 판결의 위험성이 드러난 사례가 있다. 미국의 비영리 탐사보도 매체인 '프로퍼블리카'는 범죄자의 가석방, 보석금, 형량 등을 결정할 때 범죄자의 재범 가능성을 알려주는 '콤파스'라는 프로그램의 판단 결과를 분석했다. 콤파스는 미국 일부 주들이 활용하는 프로그램이다.

프로퍼블리카는 콤파스가 플로리다에서 체포된 범죄자 1만명을 대상으로 재범 가능성을 예측한 결과, 흑인을 백인보다 2배나 억울하게 재범 대상으로 예측했다고 보도했다. AI의 잘못된 활용은 차별이나 편향성을 확대할 수 있다는 의미다.

AI 판사를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기술적인 문제가 아직 적지않은 현실이다. 양종모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공지능에 의한 판사의 대체 가능성 고찰' 논문에서 "AI 판사가 서류 작업 외에도 재판을 진행하고 각종 심문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흡사한 로봇의 개발이 필요하다"며 "여기에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시스템 등이 해결돼야 하는데 현재 단계로는 비현실적인 구상"이라고 강조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