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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 아프기만 한 청춘 [연중기획 - 청년, 미래를 묻다]

취업 실패로 시작된 ‘N포 도미노’… / “이번 생은 망했다” 자조만 넘쳐나 / 좌절감·무기력함 집단현상으로

 

“보험 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기분이에요.”

 

취업 준비만 5년째라는 전모(27·여)씨는 최근 자신의 감정을 이같이 표현했다. 집에서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라 생활비와 집세 등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 중인 전씨는 6개월여 전부터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는 “면접까지는 올라갔는데 계속 취업이 안 되니까 결국 우울증까지 걸린 것 같다”고 털어놨다.

 

요즘 청년들에게는 ‘건국 이래 부모보다 못 사는 첫 세대’라는 꼬리표가 붙고 있다. 청년기가 힘든 시기인 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열심히 살면 보다 나은 내일을 긍정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 청년들은 희망조차 잃어가고 있다.

 

취업과 연애, 결혼, 출산, 육아 등 예전엔 ‘누구나 거쳐 가는 과정’이었던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청년들에겐 ‘하나씩 포기해야 하는 것’이 되고 있다. 한때 유행처럼 번진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은 더 이상 청년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분노하게 만들 뿐이다.

 

세계일보는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아 연중기획 ‘청년, 미래를 묻다’를 통해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열심히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하며 그들의 좌절·무기력의 근원을 짚어보려고 한다. 동시에 정부와 민간의 청년 관련 정책의 효용성을 진단해보고, 청년이 다시 희망을 찾기 위한 방안을 함께 고민할 계획이다.

◆취업부터가 막막… ‘N포’의 일반화

청년 문제의 핵심은 취업이다. 취업 실패는 결혼, 출산 등 일련의 이후 과정을 포기하는 ‘N포’로 이어진다.

9일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10년 전 8% 수준이었던 청년 실업률은 2014년 9%로 치솟았고, 이후 10%에 육박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나마 이는 통계상의 수치일 뿐 비정규직과 공무원 시험 준비생 등을 포함하면 체감 실업률은 40% 수준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다.

가까스로 취업에 성공해도 또 다른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 중소기업에서 3년째 근무 중인 오모(28·여)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 일상이 된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로 건강까지 잃었지만 별도 수당을 받지 못한 데 불만이 쌓였다. 하지만 재취업을 준비할 시간이 없는 데다 당장의 생계가 걱정돼 울며 겨자 먹기로 회사에 다니고 있다.

◆‘소확행’·‘셀프 디스’… 사회 불신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청년들의 삶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나 ‘대충 살자’ 같은 신풍속도를 낳기도 한다. 서점가에선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같은 소확행 관련 책들이 인기를 끌고, 온라인 공간에선 우스운 사진에 대충 살자는 문구가 함께 담긴 ‘대충 살자 시리즈’가 유행한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란 신조어도 등장했다.

서울 소재 한 4년제 대학에 재학 중인 최모(22)씨는 “입학했을 때부터 취업에 대한 불안감과 미래에 대한 걱정을 호소하는 선배·동기가 많았다”며 “열심히 산다고 해서 다 잘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몇 번 목격한 뒤로 대충 살자 시리즈에 더욱 공감이 갔다”고 말했다. 직장인 박모(30)씨는 “획일적 잣대로 성공을 평가하고, 평가받고 싶지 않아 소확행을 추구하게 됐다”고 전했다.

급기야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자신의 스펙을 쭉 나열한 뒤 자학성 글을 남기는 ‘셀프 디스’가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회원 수로 상위권에 드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이런 셀프 디스 게시글들은 보통 ‘이 나이 먹고 지금까지 뭘 했는지 모르겠다’는 취지의 한탄을 담고 있다. 일부러 아픈 가정사나 개인적인 문제점, 장애 등을 부각하는 모습도 종종 엿볼 수 있다.

청년들의 분노가 사회를 향한 불신으로 번지는 현상도 관측된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조교 일과 과외를 병행하며 힘겹게 학업을 이어가고 있는 대학원생 김모(26·여)씨가 한 예다. 김씨는 “우리나라에선 공부도 돈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한국의 청년 행복 순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청년이 기댈 수 있는 언덕 있어야”

전문가들은 현재 청년 문제가 위험 수위에 도달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는 신용한 서원대 석좌교수는 “청년들의 좌절감과 무기력함이 집단적인 사회 병리현상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며 “그런데도 청년들에게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거나 ‘찌질하게 울지 말라’고 꾸짖는 이들은 정말로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지적했다.

신 석좌교수는 이어 “취업과 결혼, 출산 등은 일련의 과정인데 정부 정책은 고용 정책 따로, 저출산 대책 따로 노는 경향이 있다”며 “이런 부분에 대한 보완은 물론 상징적인 차원에서 청년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 즉 청년 전담 기구가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청년들을 시혜 대상이 아닌 미래의 주인공으로 보고 국가가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현주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장은 “기본적으로 청년들이 처한 환경이 지나치게 경쟁적”이라며 “학벌도, 일자리도 모두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하는데 이 때문에 다들 불안감과 긴장이 높은 상태”라고 진단했다. 기 센터장은 “이런 상황에선 결혼, 출산 등 삶의 다음 단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기가 어렵다”며 “청년들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주영 기자 buen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