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대외환경으로 불확실성이 커지고 글로벌 경쟁이 격화하면서 우리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변신을 거듭해왔다. 청과물을 팔던 삼성상회가 전 세계 반도체와 IT산업을 이끄는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로, 설탕회사로 출발한 CJ는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탈바꿈했다. 지금도 기업들은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수십년간 공들여 일궈온 주력사업마저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도전하고 있다. 10년 후, 20년 후 삼성전자의 주력사업이 어떻게 바뀔지, 반도체, IT 업계에 어떤 신흥 강자가 부상할지 예측할 수 없다.
◆DNA부터 이름까지 다 바꿨다
갤럭시폰을 쓰는 젊은 세대들에게 삼성전자가 과거 청과물과 건어물을 팔던 ‘삼성상회’로 출발했다는 사실은 낯설기만 하다. 현재 삼성의 핵심사업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정보모바일 기기, 소비자가전 등 삼성전자의 4대 사업이지만, 머지않아 바이오, 의료장비, 자동차 등이 삼성의 ‘대표선수’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CJ도 설탕회사가 모태다. 삼성그룹에서 독립하면서 회사명을 ‘제일제당’에서 CJ로 바꾸고 설탕과 밀가루 중심이었던 사업을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유통 등으로 확대하며 ‘엔터 제국’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LG화학은 전 세계 전지업체 중 유일한 화학기반 회사다. 국내 대표 화학사란 타이틀에 안주하지 않고 낯선 전지사업으로 진출, 지금은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TV용 디스플레이를 만들던 삼성SDI도 뼈아픈 구조조정을 거치며 전지사업으로 업종을 전환했고, 정유업계 맏형인 SK이노베이션 역시 ‘배터리 기업이냐’는 말을 들을 만큼 이 분야에 전사적 역량을 총집결 중이다.
검색엔진으로 시작해 국내 대표 포털기업으로 발돋움한 네이버는 로봇 관련 특허를 5건 등록하는 등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분야에 발빠르게 뛰어들어 하드웨어 산업으로 외연을 확대하고 있다. 네이버는 다양한 형태의 머신들이 도심을 스스로 이동하며 새로운 방식의 ‘연결’을 만들고 AI와 로봇이 공간의 데이터를 수집·분석·예측해, 다양한 인프라가 자동화되는 미래 도시 환경 ‘A-CITY’의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두산도 빼놓을 수 없다. 두산그룹은 1998년 오비맥주를 매각하며 주력사업을 식음료에서 중공업으로 완전히 변모시켰다. 그룹의 모태인 주류사업 매각을 반대하던 임원진에게 고(故)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두산이라는 이름이 다음 세대로 가지 못할 수 있는 상황에서 업(業)은 중요하지 않다”고 일갈했다. 두산은 매각 대금을 기반으로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밥캣(현 두산밥캣) 등을 차례로 인수해 경공업에서 중공업 기업으로 변신했다.
이처럼 기업들이 십수년 혹은 수십년간 공들여 쌓아올린 주력사업을 버리고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신사업을 선택하며 변신한 것은 IT 발달로 국가 간, 산업 간, 비즈니스 간 경계가 허물어지며 예상하지 못한 경쟁자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어제의 적이 더 이상 오늘의 적이 아니며, ‘영원한 1등은 없다’는 위기감이 과감한 변신의 동력이 된 셈이다. PC OS(운영체제) 시장의 절대강자였던 마이크로소프트와 PC 프로세서(CPU) 시장을 평정했던 인텔, 검색포털의 선두주자였던 야후, 전 세계 필름 시장을 제패했던 코닥 등 과거 절대자로 군림했던 기업들의 쇠락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독점적 지위에 안주하거나 환경변화에 적기 대응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도태되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할 수밖에 없다.
◆과도한 제한 풀어야 과감한 결단 가능해져
기존 사업기반을 버리고 신사업을 개척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00∼2014년 시총 50대 기업(비금융) 중 피흡수합병으로 소멸한 8개 기업을 제외한 42개 기업 중 주력상품이 변화해 업종이 바뀐 기업은 삼성전자, 삼성SDI, 한화테크윈 등 8곳에 불과했다.
한경연 기업혁신팀 유정주 팀장은 “우리나라가 막 발전하던 초창기에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고 안 되면 다시 도전하는 게 가능했지만 지금은 경쟁이 치열해져 진입장벽 자체가 높아지고 리스크도 커졌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대기업의 경우 문어발 확장과 총수의 전횡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상호출자제한 등의 제한이 많다 보니 신사업을 할 계열사를 늘리는 대신 차라리 해외로 나가는 쪽을 선택해온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사업 매각이나 공장 폐쇄는 뼈아픈 구조조정 등이 수반되는 만큼 구성원들의 반발과 저항도 만만치 않고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큰 부담이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이주완 연구위원은 “신산업에 진출하면 산업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우선순위도, 경쟁자 특성도 달라 기존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며 “신사업으로 옮아가는 과도기에 기존의 캐시카우를 일정 포기하려면 이를 뒷받침하는 재무안전성, 주주들에 대한 비전 설득, 신사업 특성에 맞는 기업문화 변화도 수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경연 기업연구실 김윤경 실장은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혁신하려면 과거처럼 공장 문을 닫고 구조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활발한 인수합병(M&A)과 투자를 늘리고 이를 위해 기업 경영진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며 “그러나 기업환경의 불확실성과 총수 리스크 등이 커지면서 경영진이 결단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경영진의 과감한 결단도 필요하지만, 기업이 신사업으로 이동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법적·제도적 제한부터 풀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키아, 휴대폰 접고 네트워크 장비社로 부활
핀란드의 ‘국민기업’ 노키아는 1865년 목재공장으로 첫발을 내디딘 뒤 펄프나 티슈, 타이어 등 다양한 품목을 생산했다. 1984년에는 휴대전화 분야에 새로 뛰어들었고 한때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40%에 이르는 등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다 스마트폰 트렌드를 읽지 못한 탓에 도산 직전까지 갔지만 2013년 휴대전화 사업을 완전히 접고 네트워크 장비 회사로 변신, 화려하게 부활했다. 올해 상용화된 5G(5세대 이동통신) 관련 네트워크를 국내에서 구축하는 과정에서도 노키아의 장비가 빠지지 않을 정도다.
150년에 걸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노키아는 대표적인 혁신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기술의 개발 및 교체 시기가 갈수록 빨라지고 분야별 융복합이 늘면서 기업의 변화는 당연한 일이 됐다. 수년 전만 하더라도 기업 간 인수합병(M&A)이 이뤄지면 ‘망했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였지만, 최근에는 분야별 융복합이 이뤄지고 시너지를 발휘하는 과정으로 자리 잡은 것도 같은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온라인 쇼핑몰로 출발해 ICT(정보통신기술)와 금융을 포괄하는 기업으로 거듭난 알리바바도 융합에 성공한 사례다. 중국 모바일 결제 시장에서 4분의 3에 이르는 비중을 차지하는 알리페이는 온라인 쇼핑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됐다. 결제 과정의 불신을 해결하기 위해 물건을 수령한 뒤 알리페이 판매자를 거쳐 결제 대금이 넘어가도록 하는 일종의 에스크로 서비스를 제공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온라인 쇼핑 시장이 성장한 것은 물론, 알리바바 그룹의 주력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의 타이어 회사 미쉐린은 2013년 타이어에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접목했다. 타이어와 엔진에 센서를 부착해 연료 소비량, 타이어 압력, 온도 등의 정보를 수집한 뒤 클라우드로 전송해 고객의 운전습관과 주행 정보를 분석했다. 이를 통해 언제 타이어를 교체해야 할지를 알려주고 연료 효율 증대, 온실가스 배출 저감 등의 효과를 거뒀다.
세계 최대의 ICT 기업인 아마존은 온라인 쇼핑몰 사업으로 시작했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구매, 결제, 배송 등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생성됐는데 이를 처리하기 위해 방대한 서버와 데이터 구축 시스템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유휴 서버를 이용한 것이 바로 클라우드 서비스였는데, 현재는 아마존의 주요 수익원으로 자리 잡았다. 부동의 세계 1위다.
업계 관계자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기업에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강요하고 있다”며 “제조업이든 서비스업이든 업종에 관계 없이 변화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김수미·김선영·김준영 기자 leol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