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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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살해’당한 아이들 [탐사기획-'은별이 사건' 그후]

20세 이하 성범죄 피해자/ 지난 10년 동안 4만5011명/ 13세 이상 ‘동의연령’ 간주/ “서로 좋아서”… 처벌 면제/ 임신·출산까지 했던 은별이/ 8년 지났지만 고통은 계속

‘영혼 살인.’

 

성폭행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격을 말살시키며 삶을 송두리째 흔든다. 성장기에 있는 아동·청소년들의 피해는 그래서 더 치명적이다. 인간에 대한 불신에 시달리거나 지워지지 않는 상처에 평생 괴로워한다. 때론 ‘내 잘못’이라고 자책하며 이유 모를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4만5011. 지난 10년간 영혼을 ‘살해’당한 아이들의 숫자다. 20세 이하 성범죄 피해자에 관한 경찰 범죄통계가 그렇다. 매년 4000∼5000명의 아이가 성범죄에 노출되며 그중 41.3%(2018년 기준)가 강간·유사강간 피해를 입는다. 법원에서 유죄가 선고됐다고 기억마저 지워질 리 없다.

현실은 잔인하다. ‘솜방망이’ 처벌과 ‘무죄’ 선고가 잇따른다. “외모가 성숙해서 몰랐다” “저항하지 않았다” “사랑이었다” 등 법정에 난무하는 말은 ‘흉기’다.

 

이른바 ‘은별이(A씨) 사건’은 지금 우리 사회의 단면을 정확히 보여준다. 42세의 연예기획사 대표 조모씨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15세 여자 중학생과 성관계를 맺어 임신에 출산까지 하게 만들었지만 ‘죄가 없다’고 했다. 해당 여학생은 조씨 아들과 불과 2살 차이였다. 5번의 재판을 거쳐 2017년 11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은별이가 우리 형법상 ‘동의 연령(age of consent)’인 13세를 이미 넘긴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조씨는 “성관계 동의가 있었고 서로 연인 사이였다”는 주장을 펼쳐 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

19일 세계일보 취재 결과 이제는 20대가 된 A씨는 아직도 조씨와 소송 중이다. 사건 발생 후 8년이 지났음에도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3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에서 지난해 12월 이겼으나 조씨가 불복해 다음달 26일 항소심 재판이 열린다. 조씨는 A씨의 심리상태를 검사한 뒤 검찰에 의견서를 낸 대학교수, 관련 기사에 악플을 단 네티즌 등도 고소했다.

 

A씨와 가족은 거듭된 소송에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조씨는 입장을 묻는 취재팀에 “상대방의 거짓 제보에 속지 말라”고 요구하며 자신은 잘못이 없음을 강조했다.

 

사법부의 판단은 물론 존중돼야 한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는 이 사건을 두고 ‘다른 나라 같으면 무죄가 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꼬집는다.

 

과연 그럴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세계일보 취재팀은 지난 2개월 동안 전문가들과 함께 우리나라 아동·청소년 성범죄 양상을 분석하고 현행 동의 연령 기준인 13세의 기원을 추적했다. 14개국 시민단체를 상대로 한 국제 설문조사와 대국민 인식조사도 실시했다.

 

특별기획취재팀=김태훈·김민순·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