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건이 있었다. 지난달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5·18 영화주간’에서 5·18을 다룬 최초의 장·단편영화가 처음 공개됐다. 단편영화 ‘칸트씨의 발표회’(1987)와 장편영화 ‘황무지’(1988)가 그 주인공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영화 제작자인 김태영 감독의 작품들이다.
배우 조선묵(60)이 두 영화의 주연을 맡았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그 당시엔 개봉하지 못해 속상하고 성질도 났죠. (영화 상영을) 좀 더 일찍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고 씁쓸하면서도 기분은 좋더라고요.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요. (복사본인) 비디오테이프라 화질이 어둡더라고. 김 감독도 나도 겁이 없었던 거야. 세상이 이렇게 무서운 줄 알았으면 (출연) 못 했지. 앞날을 계산했으면 못 했을 거야.”
1984년 영화계에 데뷔한 그는 운동권 출신은 아니었다. 젊은데 이런 거 한번 해야지 하는 생각에 김 감독과 뜻을 같이했다. 그는 “20대 중반에 상황을 제대로 알았으면 출연했겠냐”며 “(1989년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와 달리 ‘황무지’ 팀은 감독을 포함해 모두 영화를 업으로 삼은 프로들이었는데, 필름은 나중에 보안사가 뺏어 갔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갑숙과 방은희, 전무송도 ‘황무지’에 출연했다. 또 김성복 촬영감독이 촬영을, 록 밴드 시나위 신대철이 음악을 맡았다.
영화 내용은 가히 도전적이다. 조선묵은 광주에 계엄군으로 투입돼 상관 강압에 소녀를 사살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다 분신자살하는 탈영병 김의기 역을 맡았다. 망월동 구 묘역에서 분신자살 장면을 찍었다.
“내가 군복 입고 앞뒤에 시너를 뿌려 불을 붙이며 찍었어. 소화기가 어딨어, (스태프가) 옆에 포대기만 갖고 있었지. 미친 짓이지. 그땐 그렇게 찍었어. 지난달 그 촬영 장소를 갔다 왔어. 무명용사 묘가 있던 자리였는데 이한열·박관현 열사가 안장된 거야. 무명용사 묘를 앞으로 이장했고. 비는 오고 (마음이) 짠하더라.”
보수 성향 영화인인 정진우 감독이 영화에 투자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했다.
“그때 돈으로 3000만원이 필요했어. (1985년) ‘대학별곡’을 찍어 다행히 정 감독님의 우진필름과 친했어요. 정 감독님께는 어려워서 말씀 못 드렸고, 대신 사모님께 ‘대학생들끼리 실험적인 16㎜ 영화를 찍으려 한다’ 했는데 1400만원을 주신 거야. 지금으로 치면 한 10억원 되겠지. 그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어.”
“20∼30대엔 그다지 치열하게 살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겸손이었다. 1987년 4월13일 전두환의 호헌 선언을 비판하는 영화인 시국 성명에 소신 있게 참여했다. 영화배우는 그와 김명곤 둘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연기는 “애증의 대상”이다. 그는 “연기 연습을 진짜 안 했다”며 “연기자는 고통을 인내하며 버텨야 하는데 노는 걸 좋아했다”고 털어놓았다. 대신 미국식 에이전시를 꿈꾸며 매니지먼트사를 운영하는가 하면, ‘실종’(2008)부터 ‘재혼의 기술’(2019)까지 영화도 여러 편 제작했다. 지난해부턴 충남영상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서울과 부산을 뺀 나머지 영상위원회들은 예산이 많지 않고 인원도 적어요. 충남영상위에서 후배들과 지역 사회,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게 보람 있더라고요.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며 영상위나 영화제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요즘 나이 드는 게 행복해요. 마흔에 결혼해 40대 땐 먹고살기 바빴고 50대가 되면 가치 있는 일을 해야겠다 했는데 오만이었더라고요. 가치가 아닌 보람 있는 일을 하려 합니다.”
일흔이 되기 전 영화감독을 하는 게 꿈이다. 배우로서 욕심이 없는 건 아니다. 악역을 해 보고 싶다. 그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싸운 적 없다. 화내면 사람들이 막 웃는다”면서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