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 수복을 눈앞에 둔 1950년 9월 25일, 미군 포병 제임스 해밀턴 딜 소위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지점을 포격하면 나는 틀림없이 수백 명에 달하는 적군의 병력과 그 장비를 괴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고궁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적을 물리칠 손쉬운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크나큰 모험”을 감수하더라도 고궁, 즉 덕수궁을 일단 지키는 방식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문화유산 보호 운운하는 자체가 한가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을 한 군인들이 있었다. 전투 수행의 당사자인 군인은 대체로 문화유산 파괴의 가해자였으나 때로는 기적 같은 문화유산 보호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전쟁 시작 후 70년이 지난 지금은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기록자의 역할을 할 때도 있다.
◆사찰 파괴명령 거부한 토벌대 대장
딜 소위는 덕수궁에 모여 있던 북한군이 빠져나오길 기다렸다. 만약 그들이 남쪽을 향해 이동하며 공격을 한다면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초조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덕수궁을 나온 북한군이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제서야 포격개시의 명령이 내려졌다.
“오늘날 덕수궁이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 나는 그것만으로도 흐뭇함과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날 그 시점에 내렸던 판단과 행동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훗날 딜 소위가 쓴 수기 내용 중 일부다.
지난 24일 문화재청이 문화재로 등록 예고한 ‘6·25전쟁 군사 기록물(공군 전투비행단)’ 중에는 명패가 포함되어 있는데 김영환 장군이 주인공이다.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음은 물론 비행전대장 재직 당시 무장공비가 잠입한 해인사 폭격명령을 거부해 팔만대장경을 지켜내는 등 ‘문화재 수호자’로서의 면모로 꽤 유명하다. 이런 점에서 김 장군과 더불어 기억해야 할 인물이 빨치산 토벌대를 이끌었던 차일혁 총경이다.
전쟁 중 차 총경은 빨치산의 은신처로 활용되는 전남 구례의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사찰의 문짝을 떼어와 불을 지르며 명령을 따르는 시늉만 했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1000년 이상의 세월도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국보 67호 각황전 등 화엄사의 전각은 이렇게 살아남았다. 차 총경은 이 때문에 작전 명령 불이행으로 불이익을 당했으나 조계종 초대 종정 효범 스님은 1958년 감사장을 전달했다. 화엄사뿐만 아니라 천은사, 쌍계사, 금산사, 선운사 등 전라도의 많은 고찰을 지켜준 데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미군이 찍은 사진, 문화재 반환의 근거가 되다
지난 25일 6·25전쟁 직후 불법유출되었던 강원도 속초 신흥사의 ‘영산회상도’와 ‘시왕도’가 반환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흥미로운 대목은 두 불화의 현 소장처인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박물관(LACMA)이 반환 결정을 내린 데는 당시 한국에 있던 미군 장교 두 명이 4개월 정도의 간격으로 찍은 사진이 주효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1954년 5월 말~6월 경 통신장교 폴 뷰퍼드 팬처는 신흥사 주요 전각의 내·외부 모습을 촬영했다. 같은 해 10월 해병장교 리처드 브루스 록웰 역시 비슷한 시점의 사진 여러 장을 찍었다. 주목되는 것은 팬처의 사진에는 있던 영산회상도, 시왕도가 록웰의 사진에는 누군가 뜯어내간 흔적만 남긴 채 없다는 점. 이해 5월과 10월 사이 누군가 두 불화를 가져간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팬처와 록웰의 사진을 근거로 조계종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영산회상도, 시왕도를 반환하도록 LACMA를 설득한 것이 전쟁의 혼란이 이어지던 와중에 뜻하지 않게 제자리를 떠난 두 불화의 66년 만의 귀향을 가능하게 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