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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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사건 때마다 '개인 책임' '사실 파악' 반복하더니... 결국 '국제 망신'

뉴질랜드 총리, 文 대통령과의 정상 통화에서 한국 외교관 성추행 사건 거론
외교부 뒤늦게 “협조 방안 강구한다”… 개인 비위 치부하다 전례 없는 망신
지난 25일(현지시각) 뉴질랜드 방송 ‘뉴스허브’가 심층 보도한 한국 외교관의 성추행 의혹 사건. 뉴스허브 홈페이지 캡쳐

뉴질랜드 정부가 주(駐)뉴질랜드 한국 대사관에서 일하는 자국민이 한국 외교관한테 성추행을 당했다며 “한국 정부에 실망”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한국 외교부는 처음엔 “개인의 문제”라며 거리를 뒀다가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섰다. 조직 내에서 성폭력 문제 발생 시 이를 숨기기 급급하던 국내 대응 방식으로 일관하다 외교 문제로 비화할 처지에 놓였다.

 

31일 뉴질랜드 외교부에 따르면 이 사건에 대한 뉴질랜드 정부 입장을 묻는 연합뉴스 측에 이메일로 “뉴질랜드 정부는 한국 정부가 이 사건과 관련한 뉴질랜드 경찰의 앞선 요청에 협조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실망을 표현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뉴질랜드의 입장은 모든 외교관이 주재국의 법률을 준수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라며 “이 사안은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라 뉴질랜드 정부는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은 7월29일 저신다 아더 뉴질랜드 총리와 문재인 대통령이 통화한 내용을 공유하며 함께 알려졌다. 당일 청와대 관계자는 한·뉴질랜드 정상통화를 언급하며 “통화 말미에 뉴질랜드 총리가 자국 언론에 보도된 (성추행) 사건을 언급했다”며 “문 대통령은 ‘관계 부처가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 처리할 것’이라고 답한 게 전부”라고 말했다.

 

사건은 현재로부터 약 2년3개월 전 발생했다. 뉴질랜드 언론 ‘뉴스허브’는 7월25일 보도에서 “2017년 말 주뉴질랜드 대사관에 근무하던 한국 외교관 A씨가 뉴질랜드 국적의 남자 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A씨는 동성 부하 직원의 엉덩이와 가슴을 만지는 등 총 세 차례에 걸쳐 성추행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뉴질랜드 경찰이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가운데 현지 법원은 지난 2월28일 A씨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A씨는 2018년 이미 뉴질랜드를 떠나 현재 아시아 한 국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총영사로 근무 중이다. 

 

뉴질랜드 정부가 지적했듯이 한국 정부는 뉴질랜드 사법당국의 이 사건 수사를 놓고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했다. A씨가 뉴질랜드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을지는 본인이 결정할 문제라고 하면서 뉴질랜드 경찰이 요청한 대사관 내 폐쇄회로(CC)TV 등 자료 제공에도 응하지 않았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 AP연합뉴스

◆박원순 사건과 흡사한 대응 방식 일관했다가 ‘국제망신’

 

조직 내에서 발생한 개인의 문제를 조직 차원에서 책임지려 하지 않고 개인에게만 원인을 돌리던 모습은 국내에서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최근 성추행 의혹으로 고소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건을 두고도 서울시와 당정청은 모두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고인 추모가 우선이었고 사실관계 확인을 앞세워 ‘피해호소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서울특별시장(葬)을 진행하며 장례위원회는 성추행 의혹에 대해 “고인에 대한 일방적 주장이고 명예훼손”이라고 했다. 이후 피해자 측이 연 기자회견 내용에 따르면 피해자는 고소 전에도 이 문제를 알리려 하자 ‘(시장님이)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피해 사실을 덮으려 했다. 조직 내 발생한 문제에 책임을 통감하고 규명하기보다 조직 수장 ‘개인’의 문제로 보고 고인을 비호하는 동시에 조직이 져야 할 책임을 외면하는 모습이었다.

 

한국 외교부가 외교관 성추행 의혹에 대응한 방식도 비슷하다. 주체가 외교부로, 공간이 주뉴질랜드 대사관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한국 외교부가 외교관의 성추행 문제를 인지한 뒤에도 이 사실을 조용히 덮으려 하고 책임을 회피하다가 “한국 정부에 실망했다”는 전례 없는 공개적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피해자는 역시 A씨를 상관으로 모시는 부하 직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8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협조 방안 찾겠다”는 외교부, ‘늑장 대응’ 관습 되풀이

 

당초 외교부는 A씨가 뉴질랜드로 돌아와 조사를 받을지 여부는 A씨 개인이 결정할 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외교부는 기존에 자체 감사를 통해 A씨의 성추행 문제를 인지한 뒤 그에게 1개월 감봉 징계를 내렸다. 통상적으로 성범죄 관련 문제는 중징계 대상이다.

 

그러나 A씨가 경징계에 해당하는 ‘1개월 감봉’ 조처를 받은 이유는 외교부가 A씨 입장을 대부분 수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A씨는 외교부 조사 때 “성추행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7월29일 뉴질랜드 현지 매체도 A씨가 “나는 동성애자도 성도착자도 아니다”라며 “내가 어떻게 나보다 힘센 백인 남자를 성추행할 수 있겠느냐”고 혐의를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최근 외교 문제로 커지자 한국 외교부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협조 방안을 찾아보겠다는 입장이다. 외교부 인사제도팀과 감사관실, 국제법률국을 중심으로 이번 사안에 어떻게 대응할지 고심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외교부 당국자는 30일 “뉴질랜드 측과 협조할 용의는 과거부터 표시해왔고, 그 다음에 가능한 방안을 같이 찾아서 수사가 이뤄지는 쪽으로 협조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 내 현장·시설물에 대한 조사나 대사관 내 다른 공관원에 대한 접근은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 협약’에 따라 특권 면제가 엄격히 적용되는 사안이지만, 최대한 협조 방법을 강구하겠다는 설명이다.

 

다른 외교부 당국자는 “필요할 경우 우리 공관의 외교 면책특권의 포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공관원이 서면 인터뷰에 응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검토할 용의는 표명한 바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문서와 기록물 접근 요청에 대해서도 외교 면책특권과 불가침성을 포기하지 않는 범위에서 뉴질랜드 측의 조사에 협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길 희망한 바 있다”고 해명했다.

 

피해자 측은 ‘A씨가 수사를 피하려 조기 귀임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편다. 이에 외교부는 “A씨는 사건 발생 수개월 후인 2018년 2월 통상 3년인 외교관 임기를 마쳤기 때문에 다른 공관으로 이동한 것”이라며 “당시에 뉴질랜드 사법당국으로부터 어떠한 요청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박유빈 기자 yb@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