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또 한 번 미하원에서 탄핵되었다. 아직 상원에서 어떤 결정을 할지 모른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폭도들이 미국 의사당을 점령하기 앞서, 트럼프는 그들 앞에 서서 “당신들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하라”고 외쳤다. 그 이전에도 트럼프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진짜 미국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4년 전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운동을 할 때부터 사용되었는데, 미국의 기득권 세력들로 ‘진짜 미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목소리는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권력을 잡고 난 이후에도 ‘딥스테이트’라고 불리는 소수 기득권 그룹에 의해 본인이 공격을 받고 있고, 그래서 본인의 지지자들의 목소리 역시 전달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트럼프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 못한 것은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할 만큼 충분한 수단과 세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이 통하지 않았던 것은 그 주장이 말이 안 되기 때문이지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늘 필자가 하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 다른 목소리들에 관한 것이다.
정인이의 사망으로 인한 슬픔에서 여전히 헤어나오기 힘들다. 우리가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은 정인이야말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의 피해자가 본인을 방어할 능력을 아예 갖추지 못한 경우 우리는 그 피해자에게 더 측은지심을 갖게 된다. 방어력이 없는 피해자를 누군가는 대신 지켜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더해진다. 그 누구보다 아이의 목소리를 들어줘야 할 그 부모에 의한 공격이었기에 그 부모에 대한 분노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목소리 내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사회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지난 12월 성탄절을 앞두고 경기도의 한 비닐하우스에서 숙식을 하던 캄보디아 출신의 이주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말을 할 수 없었던 정인이와 달리 말을 할 수 있던 성인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몇몇 비정부단체들과 국회의원들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거기까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들릴 만큼의 정치 세력이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부류의 사람을 위한 수단으로 보게 되면 그 목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게 된다. 동생을 만들어주기 위해 정인이를 입양했을 때 이미 정인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었다. 이주노동자를 비싼 국내노동자를 대체할 수단으로만 보게 되면 그 목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다.
극단적으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북한에 있는 주민들이다. 철저히 북한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 수단으로 인식되기에 그들의 목소리가 북에서 제대로 들릴 가능성은 애초에 없다. 목숨을 걸고 탈출해 나온 일부 주민들만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목소리를 덮으려는 힘이 더 세면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는 어렵다.
정인이의 사망과 이주노동자의 사망에서 보듯이 약자의 목소리는 사회와 정부의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정인이, 이주노동자, 북한 주민들 모두 본인들의 힘만으로는 목소리를 듣게 할 수단과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을 도우려는 민간단체들이 있으나, 사회와 정부가 나서지 않는 한 민간부문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우리의 비겁함은 힘센 자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게 만든다. 외침은 있으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더 듣기 위해 나서야 한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