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안타깝고 억울한 죽음을 낳은 병영문화 폐습에 대해 국민들께 매우 송구하다”고 했다. 여군 부사관 성추행 사망 사건에 대해 군 통수권자로서 사과한 것이다. “군 장병들의 인권뿐 아니라 사기와 국가안보를 위해서도 반드시 바로잡겠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고인의 빈소를 찾아 명복을 빌고 유가족에게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보훈의 달이어서 더욱 가슴 아픈 장면이다.
문 대통령의 병영문화 폐습 근절 약속은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군내 성비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관행부터 바뀌어야 할 것이다. 2015년 이후 군사법원 성범죄 재판 1700여건 중 실형 선고는 10%에 불과했다. 2014년 성추행에 시달리던 여군 장교가 극단적 선택을 했는데도 군사법원이 가해자인 상관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일도 있었다.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죄인에게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 건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
지난해에는 공군 여군 대위가 “상관인 대령이 술자리 동석을 강요하고 성추행을 방조했다”며 군 검찰에 신고했지만 가해자는 무혐의 처분을 받고 피해자만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고 한다. 어이없는 일이다. 분리 근무 조치가 이뤄지지 않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근무평정에서 최하위 점수를 주는 일이 벌어졌다니 입을 다물 수 없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 ‘성희롱·성폭력 고충이 공정한 절차에 따라 처리되고 있다’고 답한 여군 비율이 48.9%로 2012년(75.8%)보다 급감한 데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대응 매뉴얼을 갖추고 무관용 엄벌 원칙을 천명했음에도 성범죄와 집단적 은폐 행위가 만연한 것은 우리 군의 성인지 감수성이 바닥권이라는 방증이다. 남성 중심의 폐쇄적인 군대 문화와 성범죄에 무기력한 군 사법제도의 개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군내 성범죄 관련 악습을 근절하려면 전군 대상 전수조사 등 철저한 실태조사와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 그리고 성비위를 저지르거나 은폐하면 엄벌이 내려지고 군복도 벗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도록 군 전체에 엄중한 경고를 보내야 한다. 공군참모총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그것으로 끝낼 일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영국처럼 군 성비위 사건 수사를 민간 경찰에 의뢰하는 등 군의 폐쇄성을 줄여나가는 방안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