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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여는 위로의 세계”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사진=남정탁 기자

“제 생각에, 60대라는 것이 그 나이만큼 원숙한 사람이 아니라 미성숙한 10대와 20대, 30대, 40대, 50대가 쌓이고 쌓여서 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경험이 많은 6, 70대의 노년에서 겹겹이 쌓인 서사를, 디테일을 끌어내기가 좋더라고요.”

 

노년 여성들의 완숙하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들을 담은 여섯 번째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문학동네)를 최근 펴낸 윤성희 작가는, 왜 소설집에 노인 서사가 많이 담겼는지를 묻자, 이같이 설명했다.

 

“한두 편을 써보니까 재밌기도 하고, 나이든 화자가 젊은 화자보다 편하게 써지는 부문도 있었지요. 한편으론 경제적으로 잘 살지 못하지만, 이런 노인들을 통해 괴팍해지는 게 아니라 귀엽게 늙어 가면 괜찮겠다, 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인터뷰 모두에 소설의 세계에 들어오는 게 처음엔 쉽지 않았다는 기자의 고백이 내내 걸렸을까, 그는 다음의 대답도 중간에 슬쩍 얹어놓는다. “처음 제 소설의 세계에 들어오기 쉽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그건 행갈이를 자주 하지 않고 주인공들의 과거 에피소드가 많이 들어갔기 때문일 겁니다.”

 

이번 소설집은 2019년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어느 밤」을 포함해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쓴 열한 편의 단편을 묶은 것으로, 노년 여성들의 삶을 다양하게 조명한 서사가 많았다.

 

그런데, 작품 속의 노년 여성들의 모습은 근현대의 ‘모던 보이’나 ‘모던 걸’처럼 ‘모던’하다. 대체로 가난하고, 남편도 꼴 보기 싫어하며, 자식도 잘 찾아오지 않지만. 단편 「남은 기억」의 영순이 손자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라, 수십 년의 시간이랄까 세대를 훌쩍 뛰어넘어 자유롭게 소통하는. “나는 손자에게 아직도 엄마한테 혼나는 꿈을 꾼다고 말해주었다. 손자는 누구한테도 혼나는 꿈은 꾼 적이 없다고 대꾸했다. 자기는 꿈속에서도 착한 아이라고.”(75쪽)

 

한때 ‘위로를 준다’는 말이 싫었다는 작가는 이번 소설들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에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며 어떤 위로를 보내는데 성공한 듯하다. 그의 위로는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 것일까. 캐얼한 복장을 한 그를 지난 9일 세계일보 사옥에서 마주했다.

 

표제작 「날마다 만우절」은 3년 전 아빠와 싸운 정숙 고모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가족들이 고모를 만나러 갔다가 각자 거짓말을 통해 품고 있던 이야기를 펼쳐낸다. 무겁지 않는 거짓말을 하거나 듣다보면 어느 새 대책 없이 소통과 힐링의 세계로 빠져든다.

 

―주요 인물들이 돌아가면서 거짓말을 하며 소통과 힐링을 하는데,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지 않는가.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을 말하기 위해 조금 긍정적으로 에둘러 가는 부문이 있잖아요. 소설 속에서 거짓말은 그런 것을 위한 장치다. 소설이라는 것도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이나 본심은 다른 이야기에 감춰져 있다. 그럴듯한 세계의 거짓말로 진짜 말하고 싶은 본질을 감춰주는 것이니까.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귀여운 거짓말들이다.”

 

―정숙 고모의 이야기 가운데 어머니를 잃은 남자의 사연과 고모의 기억이 크게 엇갈리는데(그러니까, 남자는 어릴 적 어머니가 자다가 갑자기 내렸고 고모가 걱정마라고 격려해줬다고 기억한 반면, 고모는 어머니는 당시 깨어 있었고 자신이 남자에게 해준 말은 나쁜 년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게 기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게 아니라 제가 만든 이야기다. 고모도 그런 일이 있었고 남자 아이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서로 같은 사건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같은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달리 기억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억한다. 남자는 어린 시절이었기에 어머니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할 수 없어서 유리하게 생각했지 않았을까. 고모의 경우 남자의 엄마에게 나쁜 말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남자 아이에겐 걱정 말라고 했을 수도 있겠다. 각자 기억이 전도돼 각자 믿고 싶은 것을 믿을 수 있다.”

사진=남정탁 기자

―작품 속에서 정숙 고모가 “외로우면 괴팍해지는 거야”(292쪽)라고 말했는데.

 

“나이 들어서 괴팍해지는 건 외로워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 외롭다는 건 단지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해 외로울 수 있다. 혼자 있으면서도 외롭지 않는 사람도 있다. 젊을 때부터 자신 및 타인과 잘 놀며 균형 있는 삶을 살지 못하면 나이 들어서 금방 외로워지지 않을까, 그러다보면 괴팍해지지 않을까.(윤 작가의 경우는 어떤가) 괴팍해지면 안된다,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웃음).”

 

소설집을 여는 작품 「여름 방학」은 병자는 회사에서 잘리게 되자 이름을 바꾸기로 하고 여러 이름을 생각하면서 첫 여름을 맞는 이야기다.

 

―병자는 적지 않는 나이인데, 왜 개명하려 했을까.

 

“큰 뜻은 아니고, 오빠랑 ‘병’자 돌림자 쓰는 것이 평생 싫었는데, 퇴직까지 했으니 다른 이름도 바꾸고 싶었을 것이다. 과거로부터 결별하고 싶은 마음, 다른 이름으로 다른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개명으로 연결됐다. 개명이라는 게 의지가 필요한 거잖아요. 여기에선 과거로부터 결별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그러한 마음일 것이다.”

 

작품 「남은 기억」은 위암이 재발해 폐로 전이된 60대의 영순이 자기 돈을 떼먹은 친구 복자와 함께 남편을 망가뜨린 부부의 국숫집을 찾아가 복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복수하러 가면서 수십 년간의 간격이 메워지는데.

 

―작품 속에서 복수라는 게 겨우 욕설이 전부인데, 너무 귀여운 복수 아닌가(웃음).

 

“복수가 귀엽지 않으면, 범죄잖아요. 귀여운 정도로만 했다.(각이 선 사람들이라면 법적인 대응을 했을 것이고, 그악하면 육탄전을 벌일 것이며, 아예 염증이 났다면 모른 척 하고 넘어갈 텐데) 누구에게 복수를 하더라도, 주인공이 정서적으로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악하게 복수하면 그 사람마저 피폐해진다. 뭘 하긴 해야 하지만, 주인공을 망가지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귀엽게 욕하는 정도에서 멈춘 것 같다.”

 

―끝 부문에서 복자가 물총을 맞는데, 숨겨진 의미가 있을 듯하다.

 

“복자 역시 욕을 먹어야 한다. 영순에게 돈을 갚지도 않고, 자신의 아들이 죽었으니 이미 보상한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했으니까, 뻔뻔하게. 죄책감이 다 해소되지 않았으니 물총이라도 맞아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여름이니까 물총을 맞아야 된다고 읽어도 된다.”

 

‘2019년 김승옥문학상’ 수상작인 「어느 밤」은 69세의 덕선이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에서 분홍색 킥보드를 훔쳐 밤마다 타고 다니다가 넘어져서 청년에게 도움 받는 과정을 그린 작품. 코로나19 등 힘든 삶 속에서 소통하며 서로 위로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나는 청년에게 지금 술래를 피해 얼음이 된 거라고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곧 누군가 땡하고 외쳐줄 거라고. 얼음땡 놀이란 그런 거라고.”(109쪽)

 

―일흔이 다된 분이 킥보드를 탄다는 게 흔치 않을 듯한데.

 

“주인공이 훔친 게 엄청나게 큰 킥보드가 아니라 어린이용 작은 분홍색 킥보드이다. 만만해 보이고 귀여운 것이어서 훔쳐 타보고 싶지 않았을까. 1주일 전에 훔쳤다고 한 것도 그의 나이 등을 감안하면 서서히 배우고 탔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체적 조건으로 처음 겁나서 조금씩 타다가 점점 익숙해져 신나게 타다가 넘어지게 되지 않았을까.”

 

작품 「네모난 기억」은 소설집 속의 유일한 연애 소설로, 서로 좋아하면서도 엇갈렸던 정민과 민정이 장례식장에서 세 차례나 마주치면서 관계를 상승시켜 나가는 내용이다.

―장례식장을 연애의 매개 공간으로 활용했는데.

 

“연애가 일어나기 쉽지 않는 장소 같다. 사람이 우연히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까. 결혼식장에서 만나는 연애소설보다 남을 애도하러 온 장례식장에서 계속 스쳐가면서 하는 연애소설이 재밌을 것 같았다.(왜 한 번 더 만나면 사귀자고 한 것인가) 두 번 더 만나자고 하기도 그렇고, 지금부터 사귀자고 말하는 것도 쑥스러우니까. 우연히 장례식장에서 세 번 겹쳤으니까, 한 번만 더 만나면 사귀자고 한 거다.”

 

1973년 수원에서 태어난 윤성희는 청주대 철학과를 거쳐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레고로 만든 집」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어떻게 문학의 세계,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인가.

 

“누구나 그렇겠지만, 중고등학교 때 책 읽고 끄적이는 것을 좋아했다. 철학과를 졸업할 즈음, 문학이 뭔지 공부를 좀 해보고 싶기도 하고, 2년 과정이어서 크게 늦는 것도 아니어서 서울예대 문창과에 진학하게 했다. 작가가 되고 싶어 그런 건 아니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을 써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쓰다 보니까 재밌더라. 소설을 쓰고 투고하다보니까 작가가 됐다.”

 

등단 이후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2001), 『거기, 당신?』(2004), 『감기』(2007), 『웃는 동안』(2012), 『베개를 베다』(2016) 등을, 중편집 『첫 문장』(2018)을, 장편소설 『구경꾼들』(2010), 『상냥한 사람』(2019) 등을 각각 펴냈다.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승옥문학상 등을 받았다.

 

―따뜻하고 디테일이 풍성하다는 평이 있는데, 자신의 문학세계를 조금 설명해 달라.

 

“그게 전부다. 저는 우연히 발견하는 세계, 이야기를 쓴다. 우연히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서로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통해 소통과 위로를 한다. 힘들 때 어떤 드라마를 보다보면 어떤 장면이 치유해주는 것처럼, 위로라는 건 가까운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낯선 사람이 낯선 삶, 이야기로 치유해주는 것이다. 나를 치유하려면 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하다. 따뜻한 위로의 세계를 담는다면, 그것을 우연히 만난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게 제 소설의 특징 아닐까. 단편 「어느 밤」은 제 소설에서 많이 쓰는 패턴이다. 할머니가 우연히 청년을 만났을 때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청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준다. 할머니의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청년은 뜬금없이 동생이 죽었다고 얘기를 하고, 이를 들은 할머니는 위안을 받지 않았을까.”

 

요컨대, 윤성희 소설이 펼쳐 보이는 위로의 방식이란 우연히 발견하는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통한 위로쯤 되겠다. 이는 우리 사회의 작고 미미한 존재들에 대한 애정 어린 주목을 전제로 한다. 그가 ‘작가의 말’에서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을 쓰는 동안, 나는 사람들 마음에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았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구멍을 빠져나올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들이 덜 외로울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310-311쪽)고 말한 이유일 것이다.

 

“마음의 구멍은 보이지 않다가 어느 순간 맞닥뜨렸을 때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것을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음공부 아닌가요. 소설은 언제나 상황을 만나죠. 폭발하거나 구멍이 커질 때, 이 구멍을 어떻게 다시 좁혀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진=남정탁 기자

―장편보다 단편소설을 많은 쓴 것 같은데, 단편의 매력은 무엇인가.

 

“어느 작가가 단편은 얼핏 보는 세계, 힐끔 보는 것, 어느 순간의 찰라를 보고 장면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제 적성에 맞기도 하고, 호흡도 잘 맞는다. 또 단편을 쓰다보니까 청탁도 계속 들어와서 계속 쓰게 된 것 같다. 단편소설이 많다기보다는 장편소설이 적다. 단편소설집은 이번이 여섯 번째인데, 데뷔 22년이니까 적절한 속도일 수 있지만, 장편이 적은 편이다. 되겠지, 억지로 되겠어, 하는 스타일이라서….”

 

―단편 소설을 위한 나만의 노하우가 같은 게 있는지.

 

“그런 능력은 없다. 다만 어떤 풍경이라든지 어떤 장면을 잘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단편소설은 사소한 것에서 빛이 나기 때문에, 큰 별이 아닌 작고 반짝반짝한 별을 무수히 발견해 곳곳에 심어둬야 하는 것 아닌가.”

 

―집필은 어떻게 하나.

 

“마감이 다가오면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쓰고, 마감이 없으면 하루 종일 빈둥빈둥한다. 마감이 있으면 스케줄을 짜서 계획표를 대략 짜서 쓴다. 저는 동시에 여러 작품을 쓰지 못한다. 한 작품을 끝내고 다른 작품을 쓴다. 마감이 겹치면 하나는 앞으로 댕기고. 저만의 속도에 맞게 쓴다. 쓰는 속도가 해마다 늘어지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체력적으로 딸리고, 집중력도 조금 떨어지는 것 같다.”

 

인터뷰를 끝내고 사람들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페이스대로. 앞으로 어떤 작가 어떤 작품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라고 묻자, “잘 모르겠다”면서도 피력한 그의 희망이 포개졌다. 소박하고, 소박해서 오히려 더 우뚝해 보이는.

 

“제 소설을 읽었을 때, 기분이 좋았어, 하는 작가였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덮고 났을 때, 괜찮네, 내 삶도 괜찮았네, 하고 잠깐 생각하거나 읽으면서 한두 번 피식, 하고 웃었으면 좋겠다 정도….”(2021.7.14)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