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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연기력에 깊이 있는 말솜씨… 젊은층 호응 ‘노년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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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프로 맹활약 시니어 방송인들

81세 나문희·86세 김영옥 긴장하며
손끝으로 박자 맞추며 노래 ‘감동적’
노년배우·젊은 방송인 ‘가상 부자관계’
티격태격하며 살아가는 모습 보여줘

바람직한 어른 모습 보이며 소통까지
청년엔 통찰·조언… 중장년엔 공감·위로

81세 노배우 나문희가 텅 빈 무대 위에 홀로 올랐다. 세월을 품은 그의 모습은 화려한 무대효과 없이도 보는 이의 시선을 단단히 붙들었다. 60여년 연기 경력이 무색하게도 바짓단을 꼭 부여잡은 두 손은 원로배우의 긴장을 여과 없이 보여 줬다. 건반과 기타 선율이 흘러나오자 그는 손끝으로 가만가만 박자를 맞추었고, 한 음절 한 음절 정성스레 짚어 냈다. “쓸쓸하던 그 골목을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노배우의 노래에 패널들은 그의 생애를 마주하는 듯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최근 방송된 JTBC ‘뜨거운 싱어즈’의 한 장면이다. 배우, 방송인들이 모여 합창에 도전하는 이 프로그램은 최근 유튜브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이름만큼이나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전현무, 김광규, 이종혁 같은 내로라하는 방송인들이 나오지만 주역은 단연 나문희와 김영옥(86)이다. 서툰 노래에 담긴 곡진한 이야기와 덤덤한 위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두 노장의 힘이다.

최근 연예계에서 노년배우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연륜에서 나오는 깊은 지혜로 시청자에 위로를 건네고, 때로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모습을 선보이며 용기를 준다. 사진은 나문희.

노배우들이 연예계를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탄탄한 연기력과 깊이가 담긴 말솜씨로 젊은층의 호응을 끌어내며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 중이다.

세계 최고 권위의 시상식에서 한국인 최초로 트로피를 들어 올린 이들 역시 젊은 한류 스타가 아닌 노배우들이었다. 윤여정(75)은 영화 ‘미나리’로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고, 이어 전 세계에 방영되는 미 드라마 ‘파친코’의 주연을 꿰찼다. 국내에서조차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오영수(78)는 ‘오징어 게임’으로 단번에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만 3곳에 출연 중인 김영옥은 다음 달 13일 개봉하는 ‘말임씨를 부탁해’로 65년 연기 인생 최초로 주연을 맡기도 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활약은 더 두드러진다. 예능 프로그램 전면에 선 노배우들은 연륜에서 나오는 카리스마와 거침없는 입담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특히 노령에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이들의 모습은 MZ세대에게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선사한다.

김영옥.

그동안 ‘꽃보다 할배’(2013),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2020)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시니어 출연자들의 도전을 그리며 노년층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데 주력해 왔다면, 지금은 한발 더 나아가 노년의 품격을 강조하며 세대 간 소통과 화합에 방점을 찍고 있다. ‘뜨거운 싱어즈’의 김영옥과 나문희, 그리고 박정수(70)가 MC로 출연하는 채널S ‘진격의 할매’가 대표적이다. 세 사람은 젊은 게스트들과 고민 상담을 하며 지혜를 나눈다. 때론 다정하게, 때론 단호하고 따끔한 조언을 곁들인다.

KBS ‘갓파더’는 노년 배우와 젊은 방송인을 ‘가상 부자(父子)’ 관계로 설정해 세대 간 소통을 연습하는 프로그램이다. 이순재-허재, 주현-문세윤, 김갑수-장민호가 부자지간이 됐다. 이들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 배려하고 소통하면서 세대 격차를 줄여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줬다. 이순재는 지난 제작발표회에서 “바람직한 부자 관계는 이해에서 온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이 교감을 이루고 같은 목표를 위해 협업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겠다”고 의미를 되새긴 바 있다. 지난 1월 종영한 MBN 골프 예능 ‘그랜파’는 이순재와 박근형, 백일섭, 임하룡이 초보 캐디 도경완 등 젊은 출연자들과 함께 골프 대결을 펼치며 공감대를 이루는 모습을 담았다.

KBS 갓파더 출연자.

이 밖에 KBS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는 박원숙, 혜은이, 김영란, 김청 등 노년의 여배우들이 화려했던 전성기를 지나 인생 후반전을 맞이한 일상을 보여 준다. 2017년 시즌1의 인기에 힘입어 현재 시즌3까지 방송 중이다. 은막의 베일에 감춰졌던 노년의 연예인들이 평범한 시청자들과 다를 바 없는 고민을 하는 모습에 많은 시청자가 공감과 응원을 보내고 있다.

방송가에서 이처럼 원로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을 잇달아 기획하는 것은 굳건한 시청층인 중장년을 공략하면서도, 세대 통합을 통해 젊은 세대의 시선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연륜과 지혜, 도전을 멈추지 않는 가치관 등은 바람직한 어른의 모습을 제시하며 세대 간 소통을 이끌어 내고 있다”며 “시니어 배우들의 출연은 연륜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에게는 통찰과 조언을, 중장년 시청자들에게는 공감과 위로를 건네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MBN 골프예능 ‘그랜파’ 포스터

정 평론가는 다만 프로그램을 이끌어 갈 만한 노년층 연예인이 많지 않다는 한계점을 지적했다. 예능에서 만날 수 있는 원로배우들이 손에 꼽히는 탓에 자칫 식상함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노년 스타 발굴이 쉽지 않기 때문에 프로그램 콘셉트를 변주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