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 ‘꼰대주의보’가 발동한 걸까. 국민의힘 30대 당대표 이준석과 60대 5선 중진인 정진석 의원의 공방이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두 사람은 설전을 주고받는 동안 “추태”, “싸가지”, “개소리” 등 막말에 가까운 단어를 써가며 서로를 공격했다. 이들은 국민을 대표하는 여당 정치인들이지만, 싸움의 양상은 주변에서 때때로 보게 되는 젊은이와 어르신 사이에 벌어진 세대간 말다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질은 다를 수 있지만, 더불어민주당에서도 최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지방선거 전 있었던 20대 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과 ‘586 의원’들 사이의 충돌이다.
1963년생 윤호중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달 25일 6·1 지방선거 선거대책위 비공개 회의장에서 책상을 내리치며 박 위원장에게 큰소리를 쳤고, 86세대 출신 당 지도부 의원들도 윤 위원장을 거들었다. 결국 박 위원장은 사과했고, 쇄신을 외치는 청년 정치인이 민주당에서 발붙일 자리는 좁아졌다.
세계적으로 젊은 정치인이 주목받으며 국내서도 여의도에 ‘청년’ 열풍이 불었지만, ‘나이와 계급’을 따지는 문화는 여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제의원연맹(IPU) 통계(2020년 4월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 21대 국회의원 평균 나이는 54.9세로 다른 국가들에 비해 높은 편이다. G20(주요 20개국) 가운데(하원 기준)서는 미국(58.4세), 일본(55.5세)에 이어 세 번째로 ‘늙은 국회’다.
◆‘감정싸움’ 된 두 정치인의 설전… 배경엔 당권 다툼
이준석 대표와의 싸움에서 선공은 정 의원이 날렸다. 정 의원은 6일 우크라이나로 향한 이 대표를 겨냥해 “자기 정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정부와 청와대의 외교 안보 핵심 관계자들은 대부분 난색이었다고 한다”며 “보름 전쯤 이 대표가 우크라이나행을 고집해 하는 수 없이 외교부가 우크라이나여당 대표의 초청장을 받아준 모양”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6일 페이스북에 “어차피 기차는 갑니다”라며 즉각 반격했다. 우크라이나를 방문 중인 이 대표가 이같은 글을 올린 것은 현지시간으로 새벽 5시쯤이었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라는 유명한 표현을 따온 듯한 이 글에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진 않았지만, 이날 오전 이 대표를 공개 비판한 정 의원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됐다.
이들의 설전은 이 대표의 혁신위원회 구상에 대한 갑론을박, 지방선거 공천 논란으로 이어지다 결국 노골적인 감정싸움의 양태로 변모했다.
이 대표는 우크라이나 의원들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며 ‘불리바’라는 철퇴를 들고 있는 모습을 찍어 올리며 “가시 달린 육모방망이 비슷한 것”으로 소개했는데, 이는 정 의원의 과거 발언을 겨냥한 메시지로 읽혔다. 정 의원이 2017년 5월 당 회의 때 “보수의 존립에 근본적으로 도움이 안된 사람들은 육모방망이를 들고 뒤통수를 빠개버려야 한다”고 하는 등 여러 차례 육모방망이를 공개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자 정 의원은 곧바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정치 선배의 우려를 ‘개소리’로 치부하는 만용은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라고 이 대표를 원색 비난했다. 이에 질세라 이 대표는 또다시 SNS를 통해 “당의 최다선이자 어른에 정치 선배를 자처하시면서 선제적으로 우리 당내인사를 몇 분 저격하셨나”라며 “먼저 때린 다음에 흙탕물 만들고 적반하장하는 게 상습적 패턴이라 이제 익숙해지려고도 하지만 1년 내내 반복되니 어이가 없다”라고 쏘아붙였다.
이 대표는 9일 우크라이나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기 전 다시 한 번 정 의원을 겨냥해 “1년 내내 (당대표를) 흔들어놓고 무슨 싸가지를 논하냐”고 일갈했다. 그는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흔들고 가만히 있으면 더 흔들고, 흔들고 반응하면 싸가지 없다 그러고. 자신들이 대표 때리면 훈수고, 대표가 반박하면 내부총질이고”라며 이같이 밝혔다. 이어 정 의원을 향해 “당 대표를 몰아내자고 대선 때 방에서 기자들 들으라고 소리친 분을 꾹 참고 우대해 공천관리위원장까지 맡기고 공관위원 전원 구성권까지 드렸으면 당 대표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예우는 다한 것 아니냐”라고도 했다.
이들의 갈등을 두고 물밑에서 벌어지던 당내 주도권 싸움이 겉으로도 드러났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의힘 윤리위원회가 오는 24일을 전후로 이 대표의 ‘성상납 의혹’ 관련 징계 논의에 착수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그 결과에 따라 지도부가 재편될 가능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른바 ‘윤핵관’ 중 하나로 꼽히는 정 의원은 차기 당권 주자로도 거론된다. 대선 이후 당내 신주류로 등장한 ‘친윤 세력’인 정 의원과 비주류 이 대표 간의 당권 싸움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준석에 대한 ‘극과 극’ 두 개의 평가
30대 초반인 김용태 국민의힘 청년 최고위원은 9일 이 대표와 정 의원 간 당내 갈등에 관해 ‘나이’로 상대를 깔아뭉개려는 정치판의 오래된 관행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최고위원은 이날 밤 CBS 라디오 ‘한판 승부’에 출연해 “보통 정치판에서 생각이 다른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 ‘몇 살이야’, ‘선배가 말하는데 배지 달고 와’ 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관행은) 더불어민주당에도 있고 국민의힘에도 있고 정치권 내부에 다 있다”라고 했다.
김 최고위원은 “이 대표와 저는 생각이 다른 부분도 많다”면서도 “정 의원이 (이 대표의) 우크라이나 방문을 비판하면서 러시아를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우크라이나 방문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현충일에 침략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 누가 동의할 수 있는가”라고 정 의원을 비판했다. 그는 정 의원과 이 대표 간 갈등 이면에 ‘윤핵관’들이 있다는 진행자의 말엔 “정 의원 말에 윤핵관을 자처하는 분들이 두둔하거나 했어야 했는데 당내에서 어느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따라서 정진석 의원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말한 것 같다”라며 선을 그었다.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기치로 당 대표에 당선된 이 대표는 두 차례 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젊은 정치인의 ‘성공 케이스’로 불린다. 이 대표는 취임 직후 대선과 지방선거를 총지휘하며 ‘5년 만의 정권교체’와 ‘중앙권력에 이은 지방권력 교체’라는 승리를 국민의힘에 안겨줬다. 정책과 메시지에 있어서도 그는 기성 정치인과 차별화했다. 대선 때 호남 200만 가구에 윤석열 후보의 ‘손편지’를 발송하고, 무궁화호를 임차해 만든 ‘윤석열차’를 타고 호남을 방문하는 등 호남 구애 전략을 편 것이 대표적이다. 여러 변수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국민의힘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전북과 전남, 광주 세 곳 모두에서 15%가 넘는 지지율을 얻었고, 사상 처음으로 보수 정당에서 호남 지역 광역 의원을 배출하는 성과를 냈다.
이 대표 주도의 2030 지지에 힘입어 당의 외연도 눈에 띄게 커졌다. 그가 당 대표 취임 직후 2030 세대 당원 가입을 독려한 영향 등으로 1년 전 20여만명이었던 당원이 80여만명으로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선거 기간 이 대표 주도하에 젠더, 게임, 암호화폐 등 2030에 구애하는 정책 이슈 파이팅에 앞장섰던 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이 대표는 ‘짬짬이 공천’ 관행을 고치겠다며 자신이 구상해 온 공직후보자 기초자격시험(PPTA)을 이번 지방선거에 도입했던 것도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도로 평가된다.
하지만 지난 1년간 이 대표의 행보와 관련해 당 안팎에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않다. 특히 그는 당내 갈등의 중심에 서는 일이 유독 잦았다. 지난 대선 때 이 대표는 윤석열 후보, 당 소속 의원들, 선거 조직 인사들과 공개적인 갈등을 빚으면서 두 차례나 당 대표직을 사실상 내려놓고 지방으로 ‘잠적’해 당과 대선 후보 지지율을 추락시키는 위기를 초래했다.
‘여성가족부 폐지’로 대표되는 이 대표의 젠더 관련 선거 전략도 내내 논란거리였다. ‘이대남’에 쏠린 전략을 세우면서 젊은 여성들의 반감을 사는 등 ‘2030 젠더 갈라치기’에 앞장섰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때문에 이 대표는 임기가 내년 6월까지 1년가량 남았지만, 조기 사퇴 여부 등 거취 문제가 관심을 받는 이례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위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중진 의원들 중엔 이런 이 대표나 박 위원장의 튀는 행동을 불편해 하는 이가 적지 않아 보인다. 중진 정치인들의 발언이나 태도에선 젊은 정치인들을 여전히 ‘철부지’로 여기는 분위기가 풍긴다. 반면 신진 정치세력인 청년 정치인들에게선 ‘586’을 시대 변화의 부응하지 못하는 ‘꼰대’로 보는 시각이 엿보인다. 여의도가 젊은 정치를 표방했지만, 정작 청년 세대의 약진은 세대간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드는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