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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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속 흥미로운 ‘상상’… 진지함 뒤에 담긴 ‘유쾌함’

미술가 김시종·허수영 개인전

역발상 돋보인 김시종
조선시대 초상화 같지만
알고 보면 英 여왕·로마 황후
기발한 가상의 서술도 눈길

노동집약적 작업 허수영
모래알처럼 깔린 빛나는 별
농장서 우연히 만난 꽃밭…
수없는 붓질로 우주 표현

30대인 두 젊은 미술가의 흥미로운 상상과 아이디어가 촉발한 작품들이 관람객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서울 중구 소공로에 위치한 갤러리 모리함에서 열리고 있는 김시종(39) 작가의 개인전 ‘농담 같은 진담-유쾌하고 진귀한 이야기‘와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는 허수영(38) 작가 개인전이다. 두 작가에게선 공통점이 보인다. 미술에 대한 진지한 태도,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젊은 작가 특유의 유쾌하고 재미있는 질문과 상상의 습성이다. 두 작가 전시를 소개한다.

김시종 ‘레이디 제인 그레이’(2022) 작가 제공

◆“서양이 아니라 동양이 먼저였다면?”

“레이디 제인 그레이(1536/7-1554, 재위 1553-1553). 겨우 9일 동안 여왕의 자리에 앉아 ‘9일 여왕’이라고 불린다. 반역자로 낙인찍혀 어린 나이에 처형당했다. 최근 한 가지 의문점이 제기된 것이 바로 이 초상화다. 조선시대 박승현의 초상화와 실루엣이 거의 비슷한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레이디 제인 그레이와 얼굴이 매우 흡사하다. 조선의 관료 옷 같지만 스코틀랜드의 무늬가 있으며 각종 장신구는 영국 것으로 보인다. 원래 메리 1세는 왕권이 안정되면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석방시킬 생각이었으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녀를 처형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초상화의 발견으로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딱하게 여긴 메리 2세가 그녀를 조선으로 대피시킨 뒤 대역을 처형했던 것이 아닌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 속에 흰 얼굴 파란 눈 여인이 앉아 있다. 초상화 옆에는 이 같은 설명이 쓰여 있다. 작품 제목은 ‘레이디 제인 그레이’. 작품명은 영국의 튜더 왕조 역사에서 자신의 뜻과 전혀 상관없이 여왕 자리에 올랐다 9일 만에 끌려내려온 인물 이름이기도 하다. 열일곱 나이에 처형돼 비극의 여왕으로 유명한 제인 그레이가 실은 조선으로 대피했을 가능성이 있고, 그 증거가 바로 이 초상화란다.

김시종 ‘이자벨라 드 포르투갈’(2022) 작가 제공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이자벨라 드 포르투갈(1503-1539) 초상화도 흥미롭다. 주인공은 유명 명품 무늬가 새겨진 조선시대 의복을 입고 있다. 배경에는 네덜란드의 풍차와 금강산이 보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작품 설명을 읽어보자.

“상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자벨라는 마늘과 깻잎에 빠져 조선을 자주 방문했고 여행가방으로 들고 갔던 구치 가죽을 활용해 조선식 의복을 만들어 입었는데 그것이 훗날 이탈리아로 건너가 ‘구찌’가 되었다고 한다.”

기존 역사적 사실에 흥미로운 상상, 기발한 가상의 서술을 덧붙인 스토리텔러는 김시종 작가다. 그는 실은 디지털콜라주 기법의 평면작업을 해온 작가다. ‘구글 아트 앤드 컬처’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옛 서양 초상화 고해상도 이미지에 누구나 접근 가능한 것을 확인하곤 작업할 생각에 들떴다고 한다. 무더기로 발견한 최상급 재료들을 본 작가는 흥분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서양 문화가 아니라 우리나라, 또는 동양 문화가 세계로 먼저 퍼져나갔다면 서양인 초상화는 어떤 모습이었을까”하고 역발상을 해본 끝에 이번 시리즈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서구 중심의 사고 구조와 문화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하면서도 막상 손쉽게 무언가 뒤집어볼 생각, 행동으로 옮겨 그런 시각물을 만들어 본 적이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김 작가는 전작으로 ‘플렉스’라며 유행하는 과시적 소비와 인증 행태에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정물화 디지털콜라주 작업 ‘스틸라이프’를 선보인 바 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정반대의 유쾌함이 가득하다. 작가도 “유머는 관객의 긴장을 풀어준다는 최고의 장점이 있다”며 유머러스한 작업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김 작가는 “원래는 되게 다른 것들을 붙임으로써 발생하는 이질적인 재미가 콜라주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11월 5일까지.

허수영 ‘무제20’(2022) 학고재 제공

◆“별들이 모래알처럼 많다고?”

진지함 뒤에 실은 엉뚱한 질문을 숨긴 또 다른 이는 회화 작업을 해온 허수영 작가다. 그의 작업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한겹 한겹 노동집약적으로 쌓아 올리며 제작된다. 작은 붓질을 수없이 반복해 거대한 화면을 채우고, 그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색감으로 속에서 우주의 별들이 빛나는 듯하다. 여기에 두터운 마티에르까지 더해 작품 밀도가 매우 높다. 박영택 미술평론가는 허수영 작업에 대해 “붓질의 반복되는 집적과 물감의 층을 쌓아가면서 밀도 있는 표면을 만드는데 그로 인해 화면은 이미지, 색채, 물성 등이 마냥 팽창하면서 매혹적으로 빛을 방사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현실을 압도하는 디지털, 무한하게 과잉 생산되는 복제품과 이미지들 속에서도 시간의 밀도를 담은 작품을 하겠다는 작가다. 언제라도 붕괴될 듯 거품이 증폭되는 느낌이 드는 우리의 환경 속에서도 그는 지난한 붓질 노동이 곧 회화라고 생각하며, 장시간 고밀도 작업을 통해 시간의 중첩성과 작가의 생명이 담기는 작품에서 진실함이 표현된다고 믿는 작가다. 그런 진지함 뒤에 유독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있다.

 

‘무제20’(2022)은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가운데 화면 하단을 원구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수평선이 보이니 화면 하단은 모래사장에 있는 모래알과 돌들로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래알들은 제각각 아름다운 색과 무늬를 가져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수많은 모래알 가운데 아름다운 고리를 갖춘 토성을 발견하고 나서야 ‘아, 모래알이 아니라 별들이구나’라고 눈치챌 수 있다. “우주에 별들이 바닷가 모래알만큼 많다고들 말하잖아요. 그게 대체 어떤 모습일까요?” 작가의 재미있는 상상, 호기심이 별들이 모래알처럼 깔린 거대한 우주의 모습으로 완성된 것이다.

허수영 ‘무제13’(2022) 학고재 제공

작가의 질문은 다양한 우주의 모습을 여럿 완성하는 데로 나아갔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있던 우주는 ‘무제13’에선 꽃밭으로 옮겨진다. 농장에서 우연히 보게 된 꽃밭 모습이 마치 우주의 한 장면 같았다고 한다. 그는 작가노트에서 “정원의 식물, 곤충, 흙 등 자연을 보며 그것들이 ‘셀 수 없다’는 점에 흥미를 느낀다. 몇 개인지 알 수 없는 잎사귀들, 무수한 모래알, 하나하나 다 다르게 생긴 수풀, 나무, 벌레들을 보면서 그 다양하고 많은 것을 그림에 담으려 하고 했다”며 “집착의 응집들이 어떤 생명력처럼 보여서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미지의 세계처럼 보였으면 한다”고 했다. 11월 19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