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억달러(약 130조원)에 달하는 교역 통해 적대국에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한국과 베트남이 오는 22일 수교 30주년을 맞는다. 1990년대 전 세계적인 동·서 데탕트 이후 1992년 양국이 수교를 맞은 뒤 30년 만이다. 한·베트남은 수교 30주년을 앞두고 이달 5일 기존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을 국빈 방문한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이같이 합의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9년 베트남을 방문했을 당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구축에 합의했던 양국이 13년 만에 다시 한 번 외교 관계를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베트남에겐 한국이 중국, 러시아, 인도에 이어 네 번째 포괄적 전략 동반자로, 가장 높은 단계의 외교 상대가 됐다. 한국이 베트남전에 1964년 베트남 공화국 편으로 참전할 당시만 해도 적대국이었던 양국 관계가 6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격상된 셈이다.
◆한국 인태 전략 핵심 파트너로 부상한 베트남
수교 30년 만에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구축에 합의한 양국 정부는 내년 상반기 첫 외교·국방장관(2+2) 회의 개최 등 보다 확대·강화된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최근 통화에서 “내년 상반기에 양국 관계의 구체적인 행동 계획이 나와야 할 것”이라며 “양자 간 어떤 묘미를 발휘해서 (외교·국방장관 회의가) 열릴지는 내년 일정을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2023년 6월 아시아 지역 국방장관들이 모이는 아시아안보대화(샹그릴라대화)나 7월 말∼8월 초 한·미·중·일과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외교장관들이 참석하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한·베트남 양자 회담을 개최하고, 외교 혹은 국방 장관이 추가로 참석해 2+2 회의를 개최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이 같은 양국 관계의 비약적 발전은 무엇보다도 그간의 끈끈한 경제·통상 협력에 기인한다.
2021년 기준 한국과 베트남의 총 교역액은 807억달러로, 베트남은 한국의 4위 교역 대상국이자 2위 무역 흑자국(327억달러)이다. 2021년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투자액은 27억7000만달러로, 대베트남 1위 투자국이었다.
포괄적 전략 동반자인 한국과 베트남이 향후 경제 외적인 분야로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최원기 국립외교원 아세안·인도연구센터 책임교수는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구축의 핵심은) 경제 분야뿐 아니라 경제 외적 협력을 강화하자는 것”이라며 “베트남에서도 이 같은 요구가 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안보 협력은 양국 관계에서 새롭게 주목되는 분야다. 윤 대통령은 지난 5일 푹 주석과 정상회담에서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한국과 베트남이 연대해 역내 평화와 번영을 키워나가는 것은 양국 모두에 이익이 된다”고 밝혔다. 푹 주석도 “양국의 공동 번영과 역내·세계의 평화와 안정, 협력과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협력 관계를 (증진하자)”고 화답했다.
양국 정상이 밝힌 ‘역내 평화와 번영’은 안보 협력을 지칭한다. 양국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기존 외교·안보 차관급 전략대화를 장관급으로 격상·활성화하고 해양 안보 및 국방·방위산업 분야 협력 확대에 합의했다. 최근 베트남은 사회주의 체제를 공유하는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놓고 갈등 상황에 놓여 있어 한국 등 주변국과의 우호 증진에 힘쓰고 있다.
베트남은 미국과 안보 동맹국이 아니지만, 지난해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이 베트남을 방문할 정도로 최근 중국 견제를 위해 미국이 공을 들이는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과 일본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안보협력체 쿼드(Quad)에 한국·베트남·뉴질랜드 3개국을 더한 ‘쿼드 플러스(+)’ 구상이 꾸준히 제기되는 배경이다. 미·중 경쟁 구도에서 미국으로 기운 인도태평양전략을 펴는 윤석열정부가 베트남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선 한·미·베트남 3자 협력을 정례화하는 방안도 언급되고 있으나 중국 견제 목적이 두드러지면 한국과 베트남이 부담을 느낄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차세대 경제 협력은… 산업 고도화 원하는 베트남
하지만 베트남이 한국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경제 협력 파트너라는 데 있다.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이지만 개혁·개방 이후 30년간 연평균 6% 이상의 고성장을 이뤄왔으며, 한국과 같은 수출 지향적 경제 구조를 갖고 있다. 한국 역시 경제나 안보 측면에서 ‘글로벌 중추국가’로 나아가는 데 베트남은 빼놓을 수 없는 동남아시아 경제 협력 파트너이다.
이번 한·베트남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희토류 등 핵심 광물 공급망 협력 강화를 합의했다. 베트남은 중국에 이어 세계 2위 희토류 매장 국가다. 양국은 디지털·에너지·바이오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도 실질 협력을 증진하기로 했는데, 산업 고도화를 원하는 베트남의 요구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양국의 총 교역액 목표는 2023년 1000억달러, 2030년 1500억달러이다. 그간 한국의 대아세안 무역이 베트남에 편중됐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정부는 인도네시아, 태국 등으로 대아세안 교역을 다변화하면서도 베트남과의 무역 규모 자체는 계속 늘려가겠다는 포부다.
향후 양국 협력의 질적 성장은 베트남의 기술 이전과 협력 고도화 요구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시험대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 전문가인 이한우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는 통화에서 “베트남 전체 수출의 70%는 외국인 투자 기업에 의해 발생한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수출 증가가) 베트남의 산업 자체가 발전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베트남 국내 기업을 발전시키고 교역 적자 규모를 줄이는 데 한국이 노력해 달라는 요구가 높다”고 설명했다. 베트남이 개혁·개방을 이룬 뒤 현재까지는 베트남의 저렴한 인력을 통해 외국인 투자자가 상품을 만들어 해외에 내다 파는 방식의 경제 성장을 해왔다면, 지금부터는 자국 산업 자체의 고도화를 원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베트남은 정보기술(IT) 등 기술 선진국인 한국과의 경제 협력에서도 기술 이전 등의 요구를 이전보다 더 높일 수 있다. 이 교수는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 기업에) 핵심 기술은 아니더라도 기술을 이전해 줄 수 있는 요인을 그쪽에서 만들어줘야 하고 우리 기업들도 기술 이전 요구에 조금 더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베트남, 북한 핵 협상 후 개혁·개방 모델 될 수 있나
베트남은 한국과 유교 문화를 공유한다. 또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선전과 동남아시아에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 드라마·K팝 등 문화 콘텐츠의 인기로 베트남 국민들의 대한 호감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모두 양국 관계 강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한·베트남 관계 발전은 무엇보다 양국 정부의 결단에 힘입은 바가 크다. 1992년 수교 당시 베트남 정부는 우리의 베트남전 참전 등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한국 정부도 적극적으로 과거사 사과에 이은 미래 지향적 양국 관계 발전을 모색해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은 각각 1998년과 2009년에 호찌민 묘소를 참배하고 미국이 시작한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사과했다.
체제를 유지한 채 시장을 개방한 베트남식 개혁·개방(도이머이) 모델은 북한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평가된다. 베트남을 주축으로 한 신남방정책을 펼친 문재인정부는 아세안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북한이 개혁·개방하는 데 이들 국가의 협조를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이 중 공산권 국가로서 북한과 전통적 우호 관계를 맺어온 베트남은 한국의 대아세안 경제·안보 정책의 중심이었다. 베트남은 여전히 북한과 관계가 우호적이지만 북한이 코로나19 등의 이유로 대외 관계 문을 닫아 건 현재로선 베트남을 매개로 한 대북 교류는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