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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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윤영 작가의 <냉정과 열정사이> 1편
유튜브 by PDC-<김혜수편> 캡처

 

일순간 방송국 로비가 시끌시끌했다. 점심을 마치고 로비에 있는 서점에서 소화도 할 겸 책도 살 겸 겸사겸사 신간 도서를 살펴보던 나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소음이 나는 곳으로 향했다. 방송국 로비는 ‘항시’ 의외로 조용한 편이다. 인기 연예인이나 셀럽들이 자주 드나들지만, 그것이 평범한 일상이기에 누가 나타났다고 해서 좀처럼 환호하거나 모여드는 일은 극히 드물다. 약 20여년 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로비에 있던 이들이 너나없이 웅성거렸고 몇몇은 “언니, 너무 예뻐요”라고 연호했다. 도대체 누굴까? 나의 호기심은 극에 달했다. 서점에서 아무리 고개를 길게 빼도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아 나오려던 찰나 그녀가 성큼 나에게 아니 서점으로 들어왔다. 김혜수다!

 

TV 화면에서 본 그녀는 약간 통통했고, 키가 엄청 클 줄 알았다. 하지만 육안으로 본 그녀는 너무나 말랐고, 키도 생각보다 작았다.(참고로 난 그녀의 키가 약 175㎝쯤 되는 줄 알았다) 역시 TV 화면은 그녀의 매력을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구나 싶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며칠 전 친절한 알고리즘씨(?)가 나에게 또 하나의 영상을 추천해주었고, 그 영상의 섬네일에는 ‘김혜수’라는 이름이 적시되었다.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클릭을 눌렀다. 영상은 tvN 드라마 ‘슈룹’을 끝낸 김혜수(사진)와 절친한 배우 송윤아의 만남을 담은 클립이었다. 각자 근황을 이야기하던 중 김혜수는 몇가지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했다.

유튜브 by PDC-<김혜수편> 캡처

 

“너무 외롭고 힘들었어요.

김혜수인데 저 정도 (연기는) 당연히 하는 거지.

그만해야겠단 생각도 들었어요.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던 거 같아.

후회가 단 하나도 없어요.

‘저게 끝까지 안 되는구나’라는 거를 우리는 또 느끼잖아.”

 

유튜브 by PDC-<김혜수편> 중에서

 

유튜브 by PDC-<김혜수편> 캡처

 

그리고 기억을 되돌려보자 드라마 슈룹이 방영을 시작하자마자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김혜수의 힘이 들어간 연기와 왕자로 나오는 준신인급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혹평이 쏟아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쉽게 ‘당연한 거 아니야’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름의 이유와 목적 그리고 상황, 맥락이 모두 다르다. 그러니 당연한 것은 이 세상에 단 한가지도 없다. 아마도 시청자는 ‘배우 김혜수’가 몇년 만에 복귀하는 드라마에 큰 기대를 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OTT 플랫폼에 첫회 알람을 신청했고 울리자마자 시청했다. 하지만 어떤 콘텐츠건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 예로 포르투갈의 작가 페르난도 페수아의 책 ‘안의 책’(문학동네)을 성인북클럽에서 읽은 적이 있다. 페르난도 페수아는 이명(異名) 작가로 유명하다. 필명(筆名)을 쓰는 것과 달리 페수아는 작품마다 자신의 분신 같은 가상 작가를 만들고 그 이름으로 작품을 낸다. 밝혀진 이명만 7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을 때는 처음에는 몰입이 쉽지 않다. 특히 그의 여러 작품을 연달아 읽게 되면 작품마다 확연하게 다른 세계에 약간의 혼돈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도 잠시. 그가 오로지 ‘한사람’이 아닌 여러 다른 ‘한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그의 글을 꽤 익숙하게 읽힌다. 각각의 장르와 작가를 독립적으로 살펴보면 된다.

 

김혜수라는 한사람이지만 우리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그녀의 ‘이명’(異名)을 만난다. 때로는 사건을 집요하게 파는 경찰 차수현이 되기도 하고, 돈을 쫓지만 정의에 불타는 변호사 정금자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그녀의 서로 다른 이명(異名)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다. 드라마 슈룹 역시 초반 몇편의 방영 후 다시 호평 일색이었다.

 

미국의 논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중에는 어떤 것도 보편적으로, 절대적으로, 불변하게 옳다거나 틀리다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인간의 인식과 경험의 한계를 강조한다. 모든 개인은 그들의 경험과 문화적 배경, 지식수준, 사회적 지위, 신념 등에 따라 세상을 서로 다르게 인식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언제나 열린 시각과 유연한 사고 그리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가지 더 보태자면 조금은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하다. 그래야 배우들은 더욱더 새로운 연기와 시도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터다. 만약 대중이 매번 ‘당연한 것’만 기대한다면 새로운 도전보다 ‘자기복제’를 거듭하는 ‘안전한’ 연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새로운 것, 더 달라진 연기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서 ‘후회가 단 하나도 없는’ 도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뒤에 숨어있는 그녀의 노력을 아낌없이 들여다보면 된다.

 

그래서 그녀는 살아있는 ‘레전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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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을 빌려 0.1초 정도 일면식이 있었던 김혜수 배우님을 향한 편파적인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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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 작가(방송작가, 문해력·표현력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