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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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디슈 남북 탈출·전두환 ‘美에 호헌 지지’ 친서 등 담겨

30년 경과 외교문서 36만쪽 일반 공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대표
개인청구권까진 미해결 공감대
해당 협정은 정부 간 해결 의미”
日 “재판상 구할 권리 상실” 주장

문선명 총재 북한 방문 일화도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을 주도한 양국 협상 대표가 해당 협정으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공감대가 있었다는 협상 당시 고위당국자의 발언이 외교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외교부는 6일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 36만여쪽을 일반에 공개했다. 주로 1992년에 생산된 문서들이다. 외교문서에는 전두환 정권이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중단하는 호헌 조치를 발표한 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에게 친서까지 보낼 정도로 미국의 협조를 요청했지만, 미국 측이 호응하지 않았다는 내용도 소개됐다.

 

사진=연합뉴스

외교부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1991년 8월 3일부터 이틀간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후 보상 국제포럼에 참가한 민충식 전 정무수석비서관은 “1965년 소위 ‘청구권’ 협정에 대해 한·일 양국 간 및 국민 간 인식의 차가 컸다”며 “개인의 청구권이 정부 간에 해결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고 말했다. 민 전 수석은 “당시 교섭 대표 간에도 동 협정은 정부 간 해결을 의미하며 개인의 권리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인식의 일치가 있었다”며 “당시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일본 외무상도 동일한 견해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국제법이 이제 바뀌고 있는 바,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생각할 단계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민 전 수석이 해당 포럼에서 발언한 내용을 당시 주일대사관이 본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민 전 수석 발언대로라면 당시 일본 정부도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의 소멸까지 생각했던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실체적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지만, 재판상 이를 구할 권리가 상실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개된 외교문서에서는 1990년대 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공개 증언이 국내에서 도화선이 되어 이 문제가 양국의 외교 사안으로 떠오르는 과정도 일부 볼 수 있다. 1992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이 당일 일정으로 교토를 실무방문해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일본 총리와 회담을 가졌는데, 앞서 10월 29일 과장급 의제 협의에서 일본 측은 “양국 간 현안 해결을 위해 이번 방일이 이뤄졌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일반론적으로 토의되기를 간곡히 희망”했지만 우리 정부는 “현안 존재 사실만은 간단히 언급하는 방향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외교문서에는 영화 ‘모가디슈’(2021)로 유명해진 이른바 ‘소말리아 남북 공관원 탈출’ 사건의 막전막후도 소개됐다. 1990년 12월 30일 소말리아 반정부군이 수도 모가디슈로 진격할 당시 남북 공관원들이 함께 탈출한 사건이다. 강신성 주소말리아대사를 비롯해 대사관 직원과 교민 등 한국 측 인사 7명은 1991년 1월 9일 공항에서 피신 온 김용수 북한대사 등 북측 인사 14명을 만났고, 공동 대피를 제의했다. 김 대사는 1시간 반의 여유를 달라고 했고, 결국 제의를 수락한다. 남북 공관원들은 다같이 한국 대사관저에서 1박을 보냈다. 다음 날 강 대사는 남한 측만 탈 수 있는 구조기를 제공하겠다는 이탈리아 제안을 거절했고, 이탈리아 대사관에 머무르다 이후 함께 이탈리아가 주선한 항공기를 타고 케냐의 몸바사로 탈출에 성공한다.

 

전두환 정권이 1987년 4월 직선제 개헌논의를 중단한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하고 미국이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자 5월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친서를 보냈던 사실도 공개됐다. 최광수 외무장관은 호헌조치 발표 전날 아침 일찍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대사를 공관으로 불러 담화 발표와 관련해 설명했다. 하지만 미 국무부는 원론적 입장만 밝혔으며, 미국 의회에선 지한파인 스티븐 솔라즈 전 의원이 “국무부가 명백히 비판적 입장을 취했어야 한다”고 말한 내용이 외교문서에 담겼다.

 

외교문서에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창설자인 문선명 총재의 1991년 방북시 김일성 주석 등과의 회담 일화도 담겼다. 1991년 12월1, 2일 만수대의사당 회의실에서 두 차례 있었던 만남에서 북한 측 김달현 부총리는 “북한을 도와주시려면, 제일 긴급한 원유를 살 수 있는 차관을 1억달러(현재 환율 약 1319억5000만원)에서 1억5000만달러(1979억2500만원) 정도 원조하여 달라”고 요구했다. 문 총재는 이에 “나의 경제원조계획은 북한의 기본경제를 향상시키는 공업투자, 관광단지개발투자로 할 것이며, 현금 융자는 일고의 여지가 없다”고 즉석에서 거절했다. 12월6일 함남 마전 주석공관에서 열린 김 주석과의 회담에서 문 총재는 “국제 핵사찰을 받을 용의가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다. 김 주석은 이에 “있다마다요. 그러나 굴욕적 압력 하에 강제사찰은 안 됩니다”라고 답했다. 김 주석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친하시다니 나를 좀 소개해달라”는 말도 했는데, 문 총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홍주형 기자 jh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