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훈센의 장기집권→미국·영국 유학 아들 훈마넷의 권력승계→훈마넷의 내치·외교정책은?
캄보디아의 총리 겸 최고군사령관 훈센(70)이 38년 철권통치의 길을 아들에게 터주고 내어줄 시간이 임박했다. 훈센은 권력을 이어받을 장남 훈마넷(45)을 위한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했으며, 대표적인 야당 정치인의 공직선거 출마 자격은 제한했다. 권력승계를 위한 그림은 23일 총선 절차를 통해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된다. 7대 총선의 공식 선거운동은 21일 이미 끝났다.
◆ “총선은 훈센의 선택을 강요하는 절차”
찬란한 앙코르와트 문화유산을 보유한 캄보디아가 주목받고 있다. 문화유산이 아닌 총선 등 정치일정에 대한 관한 관심이다. 외신은 캄보디아 총선과 관련, 집권여당인 캄보디아인민당(CPP)의 압승을 22일 예상했다. 하원 의석 125석을 지금처럼 독점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총선 이후 캄보디아 정치가 변화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강하다. 내치는 물론 외치에서도 훈센 정부의 친중 노선이 중립 내지는 친미·친서방 행보로 바뀔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여당의 압승이 예상되는 배경엔 훈센 총리가 자리하고 있다. 선거판에서 여당만이 뛰어놀고 성과를 낼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야당의 존재감을 지녔던 촛불당(CLP)은 총선 2개월을 앞두고 해산됐으며, 선거에 뛰어든 18개 정당은 여당을 제외하면 이름뿐인 정당들이다.
국외 망명중인 무소추아 전 여성부 장관은 이번 총선과 관련 “다른 독재자들처럼 훈센도 절대 권력을 스스로 내놓지는 않을 것”이라며 “23일 총선은 훈센이 자신의 선택을 캄보디아 유권자에게 강요하는 절차일 뿐이며, 그의 정적말살과 반대자 숙청 관행은 장남에게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훈센은 1985년 30대 초반의 나이에 권력자가 돼 한 세대가 훨씬 넘는 기간 동안 통치했다. 훈센은 적도기니의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대통령에 이은 세계 2번째 장기 집권자다. 오비앙 대통령은 1979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44년 동안 최고통치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 훈마넷, 백신접종·방역대응으로 후계 수업
모든 기간이 절대통치의 시기는 아니었다. 훈센이 총리가 됐을 당시 캄보디아는 베트남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훈센 정부가 지금이야 친중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1985년 권력을 차지할 때만 하더라도 베트남 정부의 의중을 잘 따르던 때였다. 당시 훈센은 제1총리가 아니었다. 비판세력도 존재했다.
제2총리 훈센은 1997년 쿠데타를 통해 노로돔 라나리드 제1총리를 축출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올랐다. 철권통치의 시작이었다. 이후 정적을 제거하고, 정치적 기반을 튼튼하게 다졌다. 외부의 공격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남 훈마넷은 이 과정에서 후계자로 양성됐다. 훈센은 코로나19가 한창 기세를 떨치던 2021년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한다고 선언했다. 훈마넷은 여당의 청년대표로서 코로나19 백신 접종 정책도 챙겼다. 코로나19 당시 훈마넷의 방역 대응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차기가 사실상 보장된 권력승계자의 후계 수업으로도 볼 수 있다.
기자는 이런 모습에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묘왜란 당시 두 차례 가동됐던 조선 왕실의 ‘분조’(分朝)를 떠올렸다. 일례로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의 위기 상황에서 조정을 둘러 나누는 분조를 통해 선조의 의주 행재소(行在所)와 함께 세자였던 광해군의 소조정(小朝廷)을 뒀다. 광해군은 전장에서 선조와는 다른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후 명·청 교체기의 국제정세에서 중립외교로 조선의 실리 추구를 모색했다.
◆ 훈마넷, 유학 경험 장점…훈센은 그림자
캄보디아 총선 이후의 관건은 훈마넷의 권력승계와 그가 선보일 행보이다. 총리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의원 신분이어야 하기 때문에 훈마넷은 이번 총선에서 프놈펜을 지역구로 삼아 출마했다. 이력은 나쁘지 않다. 여당의 상임위원이며, 육군대장이기도 하다. 총리경호부대장과 대테러사령관, 육군사령관, 육군 참모차장을 거쳤다. 훈마넷은 훈센 총리와 함께 중국 지도부와의 외교회동에 나서기도 했다. 흔치 않은 이력이다.
1995년 10대 후반의 훈마넷은 캄보디아 육군에 입대했으며, 같은 해 미국으로 건너가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서 4년 동안 공부했다. 이어 2002년 미국 뉴욕대학과 2008년 영국 브리스톨대학에서 경제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영국과 미국 체류 경험을 볼 때 훈마넷이 친미·친서방파로 보일 여지가 다분하다. 그가 정권을 이어받으면 미국이나 서방과 관계 개선에 나설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훈마넷이 훈센 총리의 뜻에 반하면서까지 실질적 변화를 유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더 지배적이다.
◆ 홀로서기·외교정책이 관건…실행엔 시간 걸릴 듯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가 비유하자면, ‘상왕’이 존재하는 환경이다. 조선시대에 임금 자리를 세자에게 물려주는 양위(讓位) 혹은 양위 파동 과정에서 여러 세자들은 안절부절 상황에 처하곤 했다. 눈치 없었던 대신들은 권력자의 눈 밖에 나기도 했다. 일례로 조선 초기 태종은 세종에게로 자리를 넘기겠다는 양위 파동 함정을 통해 처남 민무구·무질 형제를 처단하기도 했다.
훈센 총리도 훈마넷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총리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말고, 철권통치를 하라는 조언이다. 어쩌면 훈마넷이 제대로 서는 것은 아버지 훈센 총리의 그늘을 벗어나는 과정일 것이다. 이번엔 조선시대 말기 역사를 꺼내본다. 조선시대를 통해 유일하게 왕의 즉위 당시 생존 대원군이었던 흥선대원군을 아버지로 둔 고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라 20세를 한참 넘겨서야 자신의 정치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었다. 섭정에서 벗어나 쇄국정책 대신 문호개방정책을 펼친 게 대표적이다. 어쩌면 훈마넷에게도 그런 기간이 꽤 오래 필요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훈마넷의 정치 미래에 대해 한계 속의 기회를 거론한다. 독일의 동남아정치 전문가인 마르쿳흐 마르바움은 “젊은층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훈마넷에 대해 호감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며 “문제는 훈센의 길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러면서 “훈센은 부정부패와 정실주의라는 정치적 유산을 남겨뒀는데, 건강이 허락하는 한 훈센이 개입할 것으로 보인다”며 “훈마넷이 정책 부문, 특히 외교부문에서 다른 길을 걷기는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훈마넷이 훈센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단순히 승계했다는 이미지를 주면 국제무대에서 지지를 확보하기 힘들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