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손에 여성이 또 죽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발생한 등산로 성폭행(2023년 8월17일) 피해자가 사건 이틀 만인 19일 오후 사망했다. 피의자인 30대 남성 최모씨가 휘두른 금속 재질 흉기에 의식을 잃고 응급중환자실에 입원한 피해자는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일면식 없는 여성을 상대로 한 무차별 폭행과 성폭행, 대낮에 서울 시내 한 공원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신림역·서현역 흉기난동과 수백건의 온라인 살인예고 유행의 여파 속에서 벌어진 일이란 점에서 일단 그렇다. 경찰이 사상 최초로 ‘특별치안활동’을 선포한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범행은 저질러졌다. 흉악범죄로부터 나를 지켜줄 사회 시스템이 허약하다는 체감을 시민들, 특히 여성들은 더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사건 일시와 장소, 범행동기 모두 이러한 공포를 끌어올리기에 충분하다. ‘밤 늦게 돌아다녀서, 유흥가를 여자 혼자 배회해서, (백만 가지 이유로) 남자가 앙심을 품게 해서’ 그랬다는 이전까지의 모든 설명은 무색해졌다. 그건 진짜 이유가 아니라고, 그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피해자가 됐다는 여성들의 외침은 이제야 증명되는 걸까.
‘여자라서 죽었다’는 말은 마침내 과장이 아니게 되었다. 여성은 남자를 만나도 만나지 않아도, 심야에 외진 곳을 다녀도 한낮에 시내를 걷거나 출근길에도 그냥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다. 이것이 이번 사건을 통해 재확인 된 우리 사회에 대한 여성들의 인식이다.
◆‘젠더폭력’ 명명조차 머뭇거리는 사이에
부산 강간살인미수(돌려차기) 사건(2022년 5월), 인하대 교내 성폭력 사망 사건(2022년 7월), 신당역 스토킹 살인(2022년 9월), 시흥동 교제살인(2023년 5월), 현직 해양경찰관의 교제살인(2023년 8월). 지난 1년여간 일어난 여성 대상 남성의 강력범죄를 떠오르는 것만 정리해도 이 정도다. 모두 여성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성적 물화(物化)하는 등의 여성혐오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러한 범행동기를 분명히 구분해 ‘여성혐오 범죄’ 또는 ‘젠더폭력’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다.
범죄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명명하는 것은 근본적 개선을 위한 첫 단계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해 인하대 사건 때를 비롯해 줄곧 젠더폭력이라고 명시하는 것을 꺼려왔다. 사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히 성별화되는 범죄에서 ‘젠더’라고 하는 것도 본질을 흐리고 뭉뚱그린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데 우리 사회는 이마저도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남성의 여성 대상 폭력(Men’s violence against women)’이라고 정부 주도 성평등 정책의 기조를 내거는 스웨덴 같은 진전은 우리에게 여전히 멀고 먼 길이다.
이러한 제자리걸음의 배경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이 사회가 여성 대상 폭력을 어떤 문제나 사건으로 보기보다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났다’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성이 피해자가 되고 희생양이 되는 것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 만큼 대부분 내면화하고 있다. 그러니 이런 사건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를 뒤흔드는 뉴스가 되지 못한다. 범행 수법의 잔혹함이나 사건 관련 선정적 묘사 등을 통해 하나의 자극적 콘텐츠로 소비되는 데 그친다. ‘세상에 이런 일이’ 류의 조회수 빨아먹기용, 쓰고 버리는 카드 같은 취급을 당한다.
인권 의식이 부족한 사회에서 이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힘 없는 자가 당하는 건 당연하다’는 봉건적 인식의 잔재가 있을수록 이를 문제시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겉으로 남성 역차별론, 피해자론 등을 주장하는 사회지만 속으로는 그게 꾀병과 같다는 걸 다 알고 있다는 것 말이다. 다시 말해 아직 여성의 지위는 남성에 비해 낮으며, 그런 여성이 피해를 입는 것은 ‘사건화’되기보다는 그저 현상일뿐이다.
여성 대상 폭력을 남의 일처럼 다루는 무감함은 이렇게 명줄을 이어왔다.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반발 움직임)와 함께 이 특유의 무심함은 ‘남성 눈치보기’라는 두번째 특징으로 진화했다. 성별화 되어 나타나는 범죄 가해자에 대해 구조적 차별이나 여성혐오 대신 ‘일부 남성’의 일탈로 퉁치려는 시도, 여성 의제를 하나 둘 무력화하면서 ‘남성과 여성 똑같이 챙기기‘로 교묘히 트는 방향성이 나타난 이유다.
급기야 선거 국면 등에서 ‘여성 안전’ 관련 정책을 얘기하면 마치 표를 잃을 것마냥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이른다. 이는 정치 성향이고 뭐고 가리지 않는다. 가령 지난 대통령선거 때 20∼30대 여성 표를 단기간 급속도로 결집시킨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영입이 계속 늦춰진 것도 ‘(남성 표를 잃어서) 지지율이 혹시나 더 떨어질까봐’였다고 전해진다. 박 전 위원장이 퇴장한 이후인 지금 민주당에서의 여성 의제 논의는 거의 실종되다시피 한 상태다.
국민의힘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번에 공원 성폭행 사망 사건이 일어난 서울 관악구의 경우 구의 여성친화도시 정책을 비판하고 관련 예산을 삭감한 최인호 구의원에 대해 사퇴 촉구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는 지난해 12월 올해 예산 관련 설명을 하면서 “대한민국 최초로 ‘여성안심귀갓길’을 전면 폐기하고 ‘안심골목길’로 통합하여 남녀노소 구민 모두의 안전을 강화했다”며 “‘여성친화도시’라고 홍보하는 관악구가 ‘구민친화도시’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한 바 있다.
“여성안심귀갓길 예산 7400만원 전액 삭감”이라는 역동적인 수사의 본질은 ‘여성’이라는 이름을 빼 버림으로써 남성 유권자들이 효능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그들의 심기를 챙기느라 실제 목숨이 위협받는 여성의 안위는 뒷전이 된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내건 ‘여성가족부 폐지’ 7글자 공약도 맥락이 같다. 정치권에서부터 이런 식의 메시지가 반복되면서 안전·생존의 성평등은 후퇴하고 말았다.
◆‘해로운’ 남성성(toxic masculinity)과 ‘새로운’ 남성성
남성이 여성을 죽이는 만큼 여성은 남성을 죽이지 않는다. 이 간명한 명제조차 외면한다면 희망이 없다. 시대의 변화에 맞게 남성 시민을 길러내지 못한 책임을 사회가 통감하고, 앞으로 어떻게 재교육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는 괜한 젠더 논란을 부추기는 일 같은 게 아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성별화 된 특성을 덮어놓는 것이야말로 논란을 키우고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게 만든다. 성별을 아예 언급하지 않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지금의 백래시 양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검찰청 범죄분석통계(2021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강력범죄는 남성이 가해자인 경우가 살인 81%, 강도 86.9%, 방화 82.4%, 폭행 80.3% 등으로 나타난다. 묻지마 범죄에서도 가해자 48명 중 47명이 남성이었다는 분석(묻지마 범죄자의 특성 이해 및 대응방안 연구·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있다. 이는 전세계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은 흐름이다. 실현 불가능한 남성성 신화를 좇다 과도한 자기 연민에 빠지고 여성, 사회에 대한 억하심정을 충동적이고 폭력적으로 분출하는 남성들이 늘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전통적으로 남성성으로 분류되는 것 중에는 ‘해로운 남성성’이 포함돼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남성성은 해롭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이 추종하는 것들 중 해로운 것’에 대한 구체적 조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보다 약한 이를 폭력적으로 억누르는 것, (전통적 의미에서)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보다 위계 우위에 있다는 믿음, 집단에 해를 끼치는 공격성 등이 그렇다. 반대로 추진력과 결단력, 분명한 의견 표명, 일과 성공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은 유익한 남성성에 해당한다. (물론 앞으로는 이런 특징을 남성성/여성성으로 구분하는 것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가정보다 일을 우선하는 것이 남성적이라는 분류 같은 건 이제 구태의연하지 않은가.)
해로운 남성성을 근절하고 ‘새로운 남성성’으로 나아가자는 움직임이 해외에서는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자발적 순결주의자(involuntary celibate)의 약자인 ‘인셀’ 남성의 무차별 테러가 여성혐오에서 비롯된 것임을 읽어내면서다. 소외당하고 적응하지 못한 유색인종 이민자들이 일탈을 일삼는다는 편견과 달리 인셀 온라인 커뮤니티 사용자 다수는 북미권 젊은 백인 남성이 차지했다. 사회적 좌절감보다는 여성에 대한 분노와 성적 욕구불만이 커뮤니티를 통해 잘못 부추겨진 탓이 컸다.
새로운 남성성으로 나아가려면 가해자에게 어쭙잖은 서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정확히 호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이를 반대로 하는 형국이다. 가해자 호명은 부담스러워 하면서 어쩌다 여자를 해치고 말았는지 그 이야기는 너무 궁금해한다. 그러다 피해자 신상을 파헤치거나 여성의 피해를 선정적으로 소비하고 값싼 동정이나 날리는 최악의 방식에 치닫기도 한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먼 이 같은 행태는 용기 없고 비겁하기가 이를 데 없다고 하겠다.
페미니즘 비평서 ‘여전히 미쳐 있는’(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북하우스)에서 저자는 우리보다 먼저 총기 난사 같은 묻지마 범죄를 경험한 미국 사례를 언급한다. 여성들이 평등을 향해 이뤄 온 진전이 끊임없이 위협받았다고 하면서 저자는 ‘누가 위협했을까’라고 묻는다. 가해자를 호명하기 위한 질문이다.
저자는 “21세기 들어 목격한 충격적인 대중 살상 행위들(쇼핑몰, 술집, 학교, 예배당 등에서 일어나는 총격 행위들)이 위험에 처한 남성성을 구하겠다는 백인 남성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해진다”며 뉴욕타임스 기사를 인용해 “대량 살상자의 공통적인 특성은 여성을 향한 증오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답한다. 이어 “고등교육의 불충분한 민주화 과정 또한 앞서 말한 진전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을까? 대부분의 트럼프 지지자들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백인임을 밝히는 분석들은 이 질문이 사실임을 암시했다“고 덧붙인다.
‘남자답다’는 것에 대한 오해를 풀고, 어떻게 이들을 신뢰할 만한 동료 시민으로 키울 것인가. 맨박스(남성다움에 대한 강요)는 사실상 닿기 힘든 목표가 됐고, 젊은 남성들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성불평등과 남성의 삶의 질에 관한 연구, 2018)에 따르면 20대 남성 40∼60%가 전통적 남성성 규범에 비동의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부장적 남성성의 권력만 예전처럼 누린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흉기 난동으로 전국민이 공포에 떠는 상황에서 이를 공감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겁을 주기 위한 살인예고글을 수백건씩 올려대는 형편 없는 사회성을 갖게 된 것도 그렇다. ‘남자는 원래 그래’로 봐주기 십상이던 일탈 행위는 고칠 생각이 없으면서 ‘남자라면 이래야지’라는 압박은 벗고 싶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를 어디서부터 손 대야 할지 몰라 그냥 보고만 있는 사회다. 그러는 동안 지금 이 순간에도 피해자는 계속 나오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