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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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관계·사회로 확장되는 이야기… 은유의 화법으로 담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이우성 - 여기 앉아 보세요,
당신을 위해 비워 둔 자리에

전시장 메운 사람들 얼굴은 주변인
만난 사람·장소 저마다의 기억으로
평범한 이들의 삶 구상회화로 묘사

수박 쪼개어 낸 지난 작품에 이어
화채 그린 ‘여기 앉아 보세요’ 선봬
많은 사람에 같이 시간 보내자 권해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푸르게 빛나는 날들을 연상시키는 ‘청년’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그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진중한 한편 어딘지 순수한 그만의 목소리로 또렷이 말을 건네는 화면들. 그 이야기가 당신에게는 왜 도무지 닿지 않는 것이냐고 외쳐 묻던 얼굴들이 있었다. 이우성(40)의 회화 속 인물들은 때로 사색하고, 홀로 타오르고, 주위를 촘촘히 둘러보다 이제 자신 곁의 다정한 자리를 내어 준다. 지난 9일에 학고재에서 개막한 개인전의 제목은 “여기 앉아 보세요.”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2012)

이우성은 동시대의 초상을 회화의 언어로 풀어낸다. 담담하고 진솔하게 현재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직설보다는 은유의 화법으로서. 날마다 마주하는 사람들과 일상의 사물 및 풍경들이 그림의 소재가 된다. 주제는 개인의 삶에서 관계의 서사로, 나아가 사회적 차원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친구와 동료, 선생님과 제자, 작업실과 광장, 일상과 사회정치적 현실이 저마다의 씨실과 날실이 되어 그의 세계를 엮어낸다.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의 관점이 그러하듯이.

이우성은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후 2012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예술전문사를 취득했다. 학고재(2023; 2017), 두산갤러리(2020) 아마도예술공간(2017), 아트스페이스풀(2015), 오씨아이(OCI) 미술관(2013)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 ‘상상된 경계들’에서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았고 국립현대미술관, 아르코미술관, 독일 볼프스부르크 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일민미술관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가했다. 2013년 ‘OCI 영 크리에이티브스’를 수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청주시립미술관 등 주요 미술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 중이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한여름'(2015)

◆여기 앉아 보세요, 당신을 위해 비워 둔 자리에

이우성이 8년 전 그린 회화 ‘한여름’(2015)에서 수박은 단단하고 선명한 껍질에 싸인 채였다. 그 표면을 어떻게 부수어낼지 가늠하던 손은 2년 후 ‘당신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나눠 먹읍시다’(2017)에서 동료들과 힘을 모아 수박을 쪼개어 냈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회화 연작 ‘여기 앉아 보세요’(2023)의 화면을 또다시 거대한 수박이 메운다. 반으로 가른 수박 안에 화채 썬 과실과 둥근 얼음이 한가득 떠오른다. 부어 둔 음료수 기포가 사이사이 찬란하게 부서진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나눠 먹읍시다’(2017)

유독 수박을 자주 그리는 이유를 묻자 “누군가와 함께 나누어 먹는 과일이라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란도란 둘러앉도록 이끌어 주는 매개체라서, 날이 덥고 몸이 힘들수록 더 반가운 웃음을 가져다주는 음식이라서. 이제 수박은 비로소 다 만든 화채가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비워 둔 자리를 권한다. 여기 잠시 앉아서 같이 시간을 보내 보자고. 당신에게 닿지 못한 외침의 목소리도 사실은 단지 이런 이야기였다고 말이다. 함께 살아가는 지금의 날들을 누구나 바라는 다정함으로 채우자. 어려운 순간마다 어깨를 내어주고 서로의 손을 이끌며, 영원히 내일보다 어린 오늘을 견디어 나아가기로 하자.

‘여기 앉아 보세요’(2023)

◆현재의 날들을 기록하는 회화

모든 거대한 서사는 작은 일상의 사건들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이곳에 다시 올 거야’(2023)는 산등성이에 걸린 햇빛을 마주하며 난간에 기대어 선 세 인물의 뒷모습을 그린 회화다. 그리운 반짝임으로 오늘의 우정을 기록한 화면은 한편 우리 세대의 초상이자 시대의 향수다. 그 노을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사라지고’(2023)의 화면 속 인물이 손에 쥔 거울 속에도 찾아든다. “누구나 자신의 얼굴을 비쳐 볼 수 있기를 바라서”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대 하늘의 색채로 물들인 표면. 여기 내어 둔 자리에 찾아든 모두의 석양이 그처럼 아름답기를, 반사되어 돌아오는 눈길로부터 서로가 위로를 주고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금의 날들을 기록하는 회화는 더 큰 세계를 내다보다가도 이내 개인의 삶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한 명의 사람이 겪어내는 총체적 현재의 초상은 그렇기에 무척 내밀하고도 보편적이다.

이우성, ‘나는 이곳에 다시 올 거야’(2023) 학고재 제공

이우성은 회화의 지지체로서 캔버스뿐만 아니라 천을 자주 활용한다. 보관과 이동이 간편하여 장소의 구애를 덜 받으며, 주위의 환경과 보다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재료다. 2009년 미술대학을 졸업한 이후 최근까지 줄곧 국내외 미술기관의 레지던시를 옮겨 다니며 작업한 특유의 이력도 이유가 됐다. 캔버스에 비해 천은 다양한 작업실 환경에 맞도록 규모를 조율하거나 때마다 휴대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2013), 아일랜드 애니스코시 카우하우스 스튜디오(2014), 서울시립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2014),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더 피직스 룸(2016),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2017), 서울문화재단 금천예술공장(2023) 등 레지던시에 입주하여 작업했다.

평범한 이들의 삶을 구상회화로 묘사한다는 특징과 천에 그린 회화를 야외공간에 늘어뜨리는 설치방식이 1980년대 민중미술가들의 걸개그림을 연상시킨다는 의견도 있었다.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 등 당시의 작가가 목격한 사회정치적 사건들을 그림의 소재로 택한 점이 그러한 비평의 촉매가 됐다. 다만 이우성은 자신의 주제가 보다 소박한 일상 및 개별적인 감정에 집중하고 있음을 꾸준히 언급한다. 어떠한 변화나 전복을 위해 진취적인 주장을 내놓기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응시하는 화면임을 말이다. 스스로의 눈에 담긴 장면들을 외면하지 않으며 성실하게 기록하는 태도로서다. 그러다 지칠 때면 나란히 선 친구의 어깨에 기대어 보는, 실은 더 많은 날들을 사회보다 작은 규모의 세상 속 관계와 감정에 관한 고심으로 지새우는 우리 시대 보통의 청년으로서.

이우성,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사라지고’(2023)

◆지금 작업 중입니다, 여전히 또 앞으로도

학고재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은 9월13일까지 계속된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이우성의 주변인이다. 그간 만난 사람들, 함께 다녀온 장소들의 풍경이 저마다의 화면 위에서 또 다른 부피의 기억이 된다. 섬세하게 묘사한 초상들 가운데 ‘지금 작업 중입니다’(2023) 연작 속 자화상만이 명랑만화에서 끌려 나온 듯 뭉근하게 늘어진 모양새다. 입 내밀고 눈썹은 일그러진 채, 온종일 괴로워하며 일상을 활보하는 그에게 누가 무얼 하느냐고 물으면 “지금 작업 중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작가로서의 삶이 얼마간 고단하기도 했던 것 같다. 무기력한 우울감마저 그림으로 뱉어낼 만큼.

 

근작 회화의 제목들은 과거와 달리 특정 인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책 읽는 사람, 연보라와 청록색 그리고 무스카리 씨앗’(2023)이나 ‘큰 창문 옆에 서 있는 두 사람과 벽에 걸린 그림’(2023)과 같은 작품명은 정확하게 묘사된 인물의 외양과 별개로 색채나 구도, 소재를 지속적으로 환기함으로써 그리기의 형식 자체에 관한 고민에 더욱 집중한다는 인상을 준다. 근래의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 또한 그려진 그림으로서 처음의 본질을 되짚어 보았을까.

이우성이 작품활동을 시작한 지 꼭 15년의 시간이 흘렀다. 20대 중반의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던 청년은 이제 만 40세가 됐다. 여전히 맑은 붓으로, 조금은 더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내게 말을 건네는 화면들. 여기 앉아 보세요,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많으니. 함께 보게 될 날들이 앞으로도 수없이 남아 있으니.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