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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책임 내던지고 안면몰수… 양육비 안 주려 온갖 꼼수 [심층기획-'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상) 사라진 아빠와 고립된 엄마

“아이 낳겠다” 하자 친부 연락 끊고 악담
미혼모 68% “생부 전혀 책임 안져” 답변

양육비 소송해 받기까지도 가시밭길
송장 피하려 주소 변경·주민등록 말소
‘인터넷 만남’ 친부 신원 파악도 어려워
생부 처벌 ‘미혼부책임법’ 입법 목소리
지난 6월 ‘수원 냉장고 영아 시신’ 사건을 계기로 이뤄진 정부 전수조사 결과, 2015년부터 8년간 출산 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영·유아가 2123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우리 사회 아동 보호와 복지 시스템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영아유기·살해는 ‘개인 일탈’이 아닌 ‘사회 문제’다. 법과 제도의 미비라는 측면 외에 사회문화적 한계도 분명히 있어서다. 세계일보는 위기 임신·출산이라는 상황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생부모의 사연을 심층적으로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영아 살해’ 문제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촉구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살펴본다.

3년을 만난 동갑내기 남자친구가 하루 아침에 안면을 바꿨다. 학교에서 마주쳤는데 그냥 힐끗 쳐다보더니 지나갔고, 전화번호도 차단당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장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이 결국 닥쳐왔음을 깨달았다. ‘나, 버림받았구나.’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기대가 산산히 부서졌다. 하린(28)은 남자가 자신과 곧 태어날 아이, 둘 다 버리고 떠났음을 알았다.

 

최근 5년 사이 혼인하지 않은 상태로 두 번의 나홀로 출산을 한 나정(가명·25)도 비슷했다. 첫 번째 임신은 6~7살 연상의 동료 남성, 두 번째는 연인 사이로 동갑인 남성의 아이였다. 아이 아빠는 달랐는데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의 반응은 똑같았다. 자신은 책임 못 지겠으니 아이를 낳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아이를 낳겠다는 결정은 남성들과의 관계 단절로 이어졌다.

◆미혼모 68% “생부, 전혀 책임 안 져”

 

이대로 끝낼 순 없다고 생각한 하린은 남자를 미친듯이 찾아갔다. 끝내 돌아온 남자의 말은 냉랭했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이 무렵 하린은 자신에게 심한 우울증이 온 것을 알았다. 남자는 자신이 대학도 가야 하는데 왜 자꾸 이러냐는 식이었다.

 

분노와 절망, 우울감이 뒤섞인 어둠이 점점 하린을 집어삼켰다. 난생처음 죽음을 생각했다. 수건으로 목을 졸라본 날도 있었다. 눈앞이 캄캄한가 싶더니 세상이 막 파래졌다. 이렇게 끝인 건가 싶은 순간 겨우 정신을 차렸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넘겼지만 딱히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나중에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됐다. 갑자기 학교에서 출산을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끔찍했다. 아기에게 몹쓸짓을 한 ‘비정한 엄마’로 뉴스에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10일 세계일보가 실시한 심층 설문조사에 참여한 미혼모 69명은 ‘한국에서 미혼 여성의 임신·출산·양육 과정에 생부가 책임지는 정도’가 평균 1.33점(5점 만점)이라고 답했다. 생부가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며 1점을 준 답변이 47명으로 68.1%를 차지했다. 3점 이상을 준 경우는 단 1명에 그쳤다.

“영아 유기하니까 여자가 더 잔인하다고요? 엄마랑 아기 두 사람을 버리는 그 인간은 뭔데 그러면? 애초에 그 둘을 책임지지 않은 잘못이 제일 큰 거 아니에요?”

 

혼자 키운 딸이 올해 스무살이 된 ‘22년차 미혼모’ 여진(가명·58)은 참아왔던 말을 쏟아냈다. 60살을 바라보도록 아이 아빠에게 양육비 한 번 받지 않고 버틴 세월은 여진의 몸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빠져버린 양쪽 어금니, 흔들거리는 남은 치아들, 다 내려앉은 잇몸, 목과 허리의 디스크 등등.

 

여진의 아이는 태어난 뒤 약 1년간 출생미등록 상태로 있었다. 남자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술 먹으러 다니는 통에 혼인신고는 꿈도 못 꿨고, 아이를 호적에 올리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남자는 1년 동안 “(신고하러) 내일 가자”는 말만 반복했다. 나중에 이혼하는 게 더 힘들 것 같아 혼인신고는 포기했다. 여진은 출생신고도 못 한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며 의무 접종 주사를 맞혔다. 그러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무턱대고 애를 둘러업고 집을 나왔다. 벌금을 내고 몇 개월에 걸쳐 법적 절차를 밟아 아이를 자신의 성으로 호적에 올렸다.

◆도망간 아빠 찾아 삼만리

 

유난히 앳된 의뢰인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서였을까. 윤인권 변호사(대한법률구조공단)는 최근 맡은 사건을 떠올리면 초조해진다. 이제 막 성년이 된 의뢰인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만난 남자의 아기를 낳고 미혼모가 됐다. 경제 활동도 하지 않고 나이도 너무 어린데 원가족이 아기를 돌봐줄 형편도 못 된다. 양육비 소송마저 진다면 정말 힘들어질 상황이다.

 

남자에 대해 아는 정보는 전화번호, 실명인지 가명인지 모를 이름 두 가지뿐이다. 인터넷으로 만난 관계일 때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소송을 진행하려면 상대의 인적 사항부터 파악해야 하는데, 만약 진짜 이름이 아니라거나 본인 명의가 아닌 번호를 쓰고 있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조회를 요청한 번호와 명의자가 불일치할 경우 통신사에서 회신을 해주지 않아 주소지 등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친부가 되게 만드는 인지 청구→양육비 심판 청구→양육비 이행명령 제도(불이행 시 감치나 과태료 신청)로 이어지는 과정은 가시밭길이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남자가 잠적했거나 하룻밤 관계인 경우 등은 맨앞에 장애물이 추가된다. 송장이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면 받지 않으려고 주민등록 말소를 하거나 주소를 옮기는 등 미혼부들은 온갖 꼼수를 동원한다.

어렵게 소송을 진행하더라도 양육비 ‘집행’이 이뤄지지 않을 때도 많다. 자력 없는 남성이 돈이 없다고 버틴다면 사실상 처벌이 안 되는 실정이라서다. 3번 이상 정당한 이유 없이 양육비를 미지급하면 감치를 신청할 수 있지만 감치 결정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윤 변호사는 “운전면허 제한과 출국금지 등 제재가 추가되면서 가정법원이 오히려 감치 결정에 더 신중해진 측면이 있다”고 했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추가 제재 조치가 시행된 지 2년이 된 지난 6월 기준 677명이 제재 대상에 올랐다. 이 중 양육비 지급을 이행한 건 61명이다. 가장 오랫동안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자의 미지급 기간은 18년4개월에 달했다.

 

세계일보 설문조사에서 미혼모들은 양육비를 국가가 대신 지급하고 비양육부모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양육비대지급법, 책임을 다하지 않는 생부를 처벌하는 내용 등을 포함한 ‘미혼부 책임법’ 도입에 69명 모두 찬성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관련법은 모두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한 채 수년째 잠들어 있다.


정지혜·박유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