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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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 부딪치며 벽을 허문 파란만장 인생 이야기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정지아/마이디어북스/1만7000원

 

‘빨치산의 딸’인 작가는 사회주의자 아버지를 통해 처음 술의 세계를 접했다. 고교 졸업을 앞둔 열아홉 크리스마스 이브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자 아버지는 “쩌번에 담가논 매실주 쪼가 퍼 오소”라고 말하며 어머니와 함께 집을 비워 준다. 그렇게 작가는 소복소복 눈 쌓이는 소리와 함께 첫 술에 대한 달콤한 기억을 갖게 됐다. 백색의 눈을 보며 작가는 “이토록 순수하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수배자 신분으로 숨어 지내야 했던 3년,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홀로 지리산에 올라 산장에서 만난 이들과 갖게 된 술자리는 아찔한 기억이었다. “나 기억 안 나요? 삼 년 전인가, 서울대에서 노동자의 날 시위 때 만났는데? 그때 지아씨가 내가 든 화염병 박스 들어 줬잖아요?”라고 말하는 동석자에게 신분이 들통났지만 그들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군부 독재에 저항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위스키에 취해 잠시나마 자유와 연대의 밤을 보낸다.

정지아/마이디어북스/1만7000원

2022년 서점가를 뜨겁게 달군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작가 정지아가 첫 번째 에세이를 내놓았다. 소문난 애주가답게 술을 매개로 벌어졌던 일들과 사람들에 관한 34편의 이야기를 담았다.

유머가 담긴 소설 속 문체가 그대로 살아 있는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달짝지근한 위스키 향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친구 사귀는 데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람”인 작가가 술잔을 부딪치며 벽을 허물게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때로는 절로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목소리 크고 개성 강한 예술가들을 하나로 이어 준 막걸리의 힘을 보여 주고, 정지아를 단단한 소설가로 키워 준 두주불사 은사도 소개한다. 일본, 베트남, 몽골에서 저 멀리 아일랜드는 물론이요 이야기의 배경은 북한까지 이어진다. 방북의 기회를 얻어 간 북녘에서 보위부 간부와 술 대결을 펼친 장면은 인상적이다. 이렇게 술과 연관된 파란만장한 에피소드는 우리들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고 사람들에 대한 연민도 느끼게 한다.

“천천히 오래오래 가만히 마시면 누구나 느끼게 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을.” 작가의 이 묵직한 메시지와 함께 책장을 덮고 나면 오랜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고 싶어진다.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


송용준 기자 eidy01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