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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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그린 화가 모네의 삶을 따라가는 프랑스 여행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인상파 화가 모네가 사랑한 지베르니/빛과 색의 조화 꽃의 정원·물의 정원 모네의 작품같아/43년 거주한 ‘녹색의 집’ 들어서면 모네의 손때 묻은 가구들 그대로 

지베르니 물의 정원.

온갖 꽃이 만발한 정원 연못가에 앉아 이젤을 편 남자. 자신이 정성 들여 가꾼 꽃과 나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붓을 들어 물감을 푹 찍는다. 점점 잃어 가는 시력 때문에 사물은 또렷하지 않다. 하지만 상관없다. 아직도 여전히 빛과 공기의 색감을 볼 수 있으니. 내리쬐는 햇살이 만드는 수면의 반짝거림. 구름이 태양을 가릴 때마다 달라지는 음영. 그리고 연못에 드리운 버드나무 가지의 아른거림까지. 자연을 가장 자연스럽게 그리는 방법은 빛의 흐름을 캔버스에 담는 일.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가 평생을 걸쳐 화폭에 구현한 지베르니 꽃과 물의 정원에 서자 빛을 사랑한 그의 삶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오랑주리 미술관.

◆자연광으로 보는 오랑주리 미술관 수련

 

모네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은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시작한다. 1층 전시실로 들어서자 타원형 벽에 걸린 모네의 거대한 수련 연작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전시실 2곳에 걸린 작품은 모두 8점. 높이 2m 작품을 모두 이으면 총 너비는 91m에 달한다. 보통 미술관과 달리 오로지 자연광에 의존해 감상한다.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는 빛과 색의 농도는 마치 모네가 인생의 절반을 거주한 프랑스 노르망디주 지베르니 물의 정원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마흔세 살이던 1883년부터 지베르니에 거주한 모네는 1914년부터 수련을 그리기 시작해 1926년 86세로 타계할 때까지 수련 125점을 남겼다. 대부분의 작품은 파리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 소장돼 있지만 오랑주리 미술관 소장 작품을 으뜸으로 꼽는다.

오랑주리 미술관.

미술관은 모네를 위해 헌정한 성지나 다름없다. 모네의 수련 대작들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원래 루브르궁 튀일리 정원에 있는 오렌지나무를 위한 겨울 온실이었다. 모네는 1918년 11월11일 제1차 세계대전 휴전이 선포되자 다음 날 젊은 시절부터 막역한 친구로 지내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에게 전사자의 넋을 위로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대형 수련을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편지를 보냈고 오랑주리가 리노베이션을 거쳐 미술관으로 탄생했다. 안타깝게도 모네는 전시관이 대중에게 공개된 1927년 5월 이전에 숨을 거뒀다.

꽃의 정원.
꽃의 정원.
꽃의 정원.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의 작품을 가장 효과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손꼽힌다. 1층 2개 전시실을 타원형으로 벽을 설계했고 모네의 요청에 따라 자연광을 미술관으로 들였다. 빛의 강도에 따라, 계절에 따라 작품 분위기가 달라지는 이유다. 특히 물가의 버드나무와 연못이 어우러지는 2전시실 작품은 모네의 미술 인생이 집약된 걸작이다. 1층은 오로지 모네 작품만 걸렸고 다른 전시실에서 피카소, 마티스, 드랭, 르누아르, 세잔, 루소, 모딜리아니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으니 그림을 사랑한다면 파리 여행에서 오랑주리 미술관을 빼놓을 수 없다.

꽃의 정원.
꽃의 정원.
꽃의 정원.

◆모네가 사랑한 지베르니

 

대가의 작품을 직접 눈앞에서 보니 무한한 감동이 밀려온다. 작품의 실제 배경인 지베르니는 어떨까. 한없이 커지는 호기심에 마음은 이미 저만치 앞서 달려간다. 파리에서 차를 몰아 북쪽으로 1시간30분을 달리면 작은 마을 지베르니에 닿는다. 이른 오전인데도 넓은 주차장은 빈틈이 없다. 어렵게 주차하고 다시 1시간가량 줄을 서 정원으로 들어서자 알록달록 수많은 꽃이 지천으로 핀 풍경에 감탄이 쏟아진다. 마치 천상의 화원을 거니는 듯, 꿈을 꾸는 것 같다.

꽃의 정원 전경.
꽃의 정원.
꽃의 정원.

정확히 말하면 모네의 작품을 실사로 보는 기분이다. 모네는 생전에 자신이 남긴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 바로 ‘정원’이라고 고백했는데 실제 보니 그 말뜻이 쉽게 이해된다. 화가이자 정원사인 모네는 작품을 위해 자기 손으로 정원에 수국, 백합, 작약, 황수선화, 붓꽃, 장미와 나무를 심고 잡초나 시든 꽃은 제거하며 직접 정원을 관리했다. 처음부터 그림을 그리듯, 꽃과 식물의 색에 따라 층을 이루며 배치를 달리했다니 천재의 머릿속은 남다르다.

꽃의 정원 중앙 터널통로.
꽃의 정원.
꽃의 정원.

실제 ‘물감통’으로 불리는 모네의 정원은 아치형 구조물을 설치한 중앙 메인 통로를 중심으로 화단 19개에 심어진 꽃 색깔이 캔버스에 그러데이션으로 구현한 것처럼 정렬돼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빛에 따라 달라지는 느낌까지 정확하게 계산했다는 점이다. 정원 아래는 빨강 등 따뜻한 색감의 꽃이 심어졌는데 저녁 햇살이 비추면 따뜻한 느낌이 강화된다. 또 정원 위쪽엔 아침 햇살에 노출되면 차가운 느낌이 극대화하도록 파랑 등 차가운 색상의 꽃을 심었다. 그는 시간에 따라 빛과 색상이 서로 작용하며 달라지는 모습을 보기를 원했단다.

중앙통로는 들어갈 수 없지만 정원 둘레를 따라 산책로가 놓여 천천히 걸으며 모네의 정원을 둘러볼 수 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꽃의 종류가 많고 이름도 모르지만 상관없다. 모네의 작품을 즐기듯 여유 있게 꽃과 식물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면 된다.

 

지베르니 마을 사람들은 모네가 땅에 정원을 만들고 마을을 휘감아 도는 센강의 지류인 엡트강 물길을 끌어 연못을 만들겠다고 하자 극렬하게 반대했다. 땅과 물은 곡식을 생산하고 가축을 먹이는 데만 필요하다고 여겼고 모네의 정원이 땅과 물을 망쳐 버릴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정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작품들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모네의 집념에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현재 모네 재단 소속 정원사 10명이 매일 정원을 관리한다.

모네의 집.
모네의 집.

◆수련이 탄생한 물의 정원

 

모네의 집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외벽을 옅은 분홍색으로 칠하고 창틀과 덧창, 난간, 계단을 밝은 녹색으로 꾸몄는데 앞마당에 핀 분홍, 빨강 산파첸스 등과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그림엽서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모네가 어디선가 걸어 나올 것만 같다. 모네의 손때 묻은 가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공간의 인테리어가 잘 보존돼 있어서다.

1층 아뜰리에.
1층 아뜰리에.

1층은 거실 겸 아틀리에. 복제품이지만 그의 대표 작품들이 벽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모네의 흉상과 빛바랜 흑백사진도 놓였고 소파와 테이블 등 목제가구에서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2층으로 올라가면 생활공간들이 차례로 등장하는데 역시 모네 그림처럼 알록달록 색감이 넘쳐난다. 방마다 모두 다른 색으로 꾸며져 모네가 얼마나 빛과 색에 치중했는지 잘 보여 준다.

모네의 집 거실.
모네의 책상.
다이닝룸.
부엌.

하늘색 거실을 지나면 벽, 장식장, 의자를 화사한 노란색 의자로 꾸민 주방이 등장한다. 모네의 방엔 아름다운 꽃무늬 양탄자 위에 소나무로 제작한 가구들이 놓였는데 뚜껑을 여닫는 고풍스러운 책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모네의 집에서는 두 번째 부인 알리스 오슈데와 둘 사이에 태어난 딸 블랑슈 오슈데, 모네의 문하생과 며느리가 그린 작품도 만날 수 있다. 1층 녹색 난간과 복도, 계단이 포토존으로 최고의 인생샷을 건질 수 있으니 놓치지 말기를.

물의 정원.
물의 정원.
물의 정원.
물의 정원.

다시 꽃의 정원으로 나와 대나무숲을 지나면 모네가 남긴 걸작, 수련이 탄생한 물의 정원을 만난다. 작은 녹색 아치형 다리 위에 서면 누구라도 모네의 작품이 되는 시간.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버드나무, 물 위에 떠 있는 녹색 수련과 연꽃들, 다양한 색을 뽐내는 수많은 꽃까지 모네의 작품 속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꽃, 나무, 하늘 등 물 위로 반사되는 자연의 다양한 색채와 시시각각 달라지는 공기의 색을 캔버스에 담던 모네에게 이곳은 작은 천국이었을 테지. 시력을 거의 잃은 말년에도 정원의 빛과 색을 담기 위한 붓을 놓지 않던 모네의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지베르니(프랑스)=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