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한 배우와 소속사의 재계약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재계약을 알리는 ‘형식’이 눈길을 끈 것인데, 주인공은 ‘동백꽃 필 무렵’ ‘사이코지만 괜찮아’ ‘악귀’ 등에서 존재감을 보여 준 오정세와 그의 소속사 프레인TPC. 통상 재계약 소식은 소속사 홍보팀이 작성한 형식적인 문장의 보도자료로 배포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오정세의 경우는 달랐다. 배우 본인이 직접 소속사와 ‘왜 재계약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편지 형식’으로 전한, 그러니까 전에 본 적 없는, 독창적인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편지 내용은 또 어찌나 위트와 애정이 가득한지. “재계약을 했다고 하면 대개 의리를 지켰다고 보도하는데 저는 의리로 재계약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문을 연 오정세는 “주변에 자랑하고 싶은 회사,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배우의 여러 고민을 자기 일처럼 고민하고 아파하며 기뻐합니다”라며 회사와 상호 소통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한편 “매년 배우들에게도 상여금이 있다는 사실은 안 비밀, 신년 계획을 달성한 배우 1인에게 유럽 비즈니스 항공권으로 응원하는 건 안 비밀”이라며 회사 복지를, 자신의 연기 스타일만큼이나 개성 있게 자랑하기도 했다.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내용 중, 내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문 건 의리로 재계약하지 않았다는 부분이었다. 그동안 연예인의 재계약 소식 뉴스를 볼 때마다 뭔가 불편했던 감정이 저 ‘의리’라는 단어 때문이었음을 깨달아서다. 오정세 말마따나, 소속사와 인연을 이어 나가는 연예인에게는 ‘의리를 지켰다’는 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 現 소속사와 재계약 체결 의리 행보” “재계약 ○○○, 빛나는 의리!” 이 상투적인 표현을 발견할 때마다 늘 갸웃했다. 의리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 그렇다면, 재계약하지 않는 건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인가. 배신이라는 말인가. 정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인가.
한국 사회에서 의리라는 단어가 오염된 건, 꽤 오래됐다. 의리라는 말을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루트는 ‘조직폭력배’다. 헤이, 부라더. 솨라 있네. 으리에 살고 으리에 죽는 것이여. 서로의 허물을 덮어 줄수록 의리는 더욱 공고해진다. 켕기는 일을 눈감아 주면서 외친다. ‘우리가 남이가!’ 상명하복으로 이뤄진 수직적 조직일수록, 의리는 더 강조된다. 대개의 경우 의리는 힘 있는 자의 ‘액받이’로 활용되곤 한다. 시혜를 베풀어 심리적 부채를 갖게 하고, 이를 통해 맹목적 충성을 얻어내는 것이다. 약자는 충성함으로써 또다시 보상을 받는다.
내부 구성원끼리의 굳건한 의리는 외부인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진다. 때론 우리의 주거도 위협한다. 원칙도 명분도 없이 측근이라는 이유로 주요 자리를 내주는 회전문 인사, ‘순살아파트’ 논란을 불러온 LH공사의 전관예우, 퇴직 후 자신이 몸담은 현직 검사 후배들과 각별한 돈 관계를 맺는 불공정 카르텔…. 비리를 알면서도 묵인하고 공모하는 게, 의리인가.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야만 훗날 자신도 그 혜택을 받으리라는 생각에 눈감아 버리는 건 아니고?
정치판 역시 의리라는 단어가 오용되는 곳 중 하나다.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권력을 집어삼킨 배경에는 ‘하나회’라는 사조직이 있었다. 이 사건을 그린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황정민)은 막 하나회에 가입한 신입 장교를 자기 의자에 앉히며 사이비 교주처럼 최면을 건다. “이제부터 자네는 나야. 나는 자네고.” 조폭형 정치의 시작이다. ‘의리와 맹세를 저버리면 인간적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을 각오한다!’ 하나회 충성 서약 중 하나다.
전두광은 의리를 추동하는 힘이 ‘떡고물’임을 간파하고 있다. “저 안에 있는 인간들,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봐 그거 묵을라고 있는 기거든. 그 떡고물 주딩이에 이빠이 처넣어줄 끼야, 내가.” 그렇게 의리는 도매급으로 떡고물과 맞교환됐고, 누구 하나라도 입을 뻥긋하면 나도 망하고 너도 망하기에 이 공동운명체는 더 강하게 뭉쳤다. 그리고 이 의리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는가는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또 누가 으리으리한 의리를 말로만 부르짖는지 지켜볼 일이다. 쉽게 뱉은 의리가 배신으로 돌아왔을 때, 어떤 막말과 보복이 횡행하는지도.
정시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