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직선과 곡선의 조화… ‘화쟁의 사유’를 담아낸 미술관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42) 도시와 자연, 예술의 일체 ‘스페이스K’

서울 서남부의 공공기여형 예술 인프라
베니스 비엔날레 대상 수상 조민석 설계
마곡지구 반듯한 건물들과 대응한 ‘직선’
공원과 연결되는 보행축을 따르는 ‘곡선’
서로를 돕고, 동시에 둘을 넘어 큰 하나로

점심시간에 혼자 쉬고 싶을 때 사무실에서 설렁설렁 걸어 5분이면 도착하는 ‘스페이스K 서울’을 찾는다. 입장료 할인 혜택도 있지만 무엇보다 미술관의 규모가 크지 않아 점심시간 안에 음성 전시해설을 끝까지 들을 수 있다. 전시가 없을 때는 공원과 연결된 경사로를 통해 옥상에 올라 멍때리기도 한다. 고작 한 층 정도의 높이밖에 안 되지만 스페이스K 옥상에 올라서면 주변의 번잡함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한 느낌이다.

스페이스K는 자연과 인공, 공원과 도시, 직선과 곡선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동시에 솔기가 없는 건물의 형태는 무기체의 건축물이 유기체로 변한 듯하다.

스페이스K는 서울에서 가장 젊은 동네인 마곡지구 내 한다리문화공원에 있다. 공원은 8300㎡로 작은 크기지만 공원을 둘러싼 주변 성격은 꽤 다양하다. 일단 마곡지구를 관통하는 주요한 보행축이 한다리문화공원에서 만난다. 남북 방향의 보행축은 서울식물원에서 시작해 마곡지구를 관통한 뒤 공항대로를 건너 수명산까지 이어진다. 대략 1.5㎞ 길이다. 동서 방향의 보행축은 발산역과 마곡역을 연결하는데, 카페나 음식점이 많아 ‘마곡 문화의 거리’로 불린다. 대략 1.3㎞ 길이의 동서 보행축은 지하철이 발산역에서 방향을 90도로 틀기 때문에 회전 반경을 고려한 곡선 형태다. 도시계획가가 의도하지 않은 이 곡선은 마곡지구의 격자형 블록을 관통하며 경관의 변화를 만들어 낸다.

공원 주변의 토지 이용을 보면 산업용지, 지원시설용지, 상업용지로 다양하다. 그러다 보니 출퇴근 시간대, 점심시간, 휴일에 보행자들의 이동 방향이 각각 다르다. 다만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 가장 짧은 경로는 같다. 이런 패턴 때문에 한다리문화공원 가운데에는 ‘X’자 형태의 보행 공간이 조성돼 있다. 그리고 보행 공간 주변의 서남북 세 방향에는 참나무를 심은 언덕이, 동쪽에는 스페이스K가 배치돼 있다.

스페이스K는 마곡 산업단지의 선도기업이었던 코오롱 컨소시엄이 원앤온리타워(One&Only Tower)를 지으면서 서울시에 기부채납한 시설이다. 그래서 공공기여형 예술 인프라로 분류된다. 시설을 받은 서울시는 코오롱에 20년간 운영을 위탁했다. 코오롱은 과천 본사를 시작으로 5곳의 미술관을 운영하다 지금은 스페이스K 운영에 집중하고 있다. 스페이스K가 있는 서울 서남부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인프라가 부족하다. 그래서 주변 주민들에게 마곡 도시개발과 함께 지어진 LG아트센터와 스페이스K는 반갑고 소중하다.

스페이스K의 설계자는 건축가 조민석이다. 10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던 조민석은 국제적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국내 건축가다. 올해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참여한 영국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설계를 맡기도 했다. 그는 스페이스K를 도시 맥락을 심도 있게 고민한 결과로 설명하며, ‘새로운 공공장소로서의 미술관’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그의 고민을 짐작할 수 있는 요소는 건축물의 조형을 이루는 곡선과 직선이다. 스페이스K의 평면도에서 시작된 두 요소 중 직선은 마곡 도시개발을 통해 만들어진 주변의 반듯한 건물과 땅에 대응한다. 그래서 건물의 북쪽과 동쪽 입면은 맞은편 건물들과 닮은 직벽이다. 반면 곡선은 앞서 언급한 ‘X’자 형태의 보행 동선과 공원 언덕 그리고 발산역과 마곡역을 연결하는 보행축에 대한 대응이다. 그래서 건물의 남쪽과 서쪽은 하나의 곡선 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곡선과 직선 중 미술관의 더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친 요소는 곡선이다. 곡선은 평면뿐만 아니라 주출입구, 경사로, 계단 위 아치, 단면 구조 등의 형태에 적용돼 있다. 곡선의 모습도 그 쓰임에 따라 각각 다른데, 미술관의 입구는 폭이 넓은 곡선이지만 계단 위는 높게 솟아오른 곡선이다. 그래서 한다리문화공원에서 스페이스K를 바라보면 공원과 미술관에 쓰인 여러 형태의 곡선이 어우러지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무주공간과 다양한 층고를 통해 유연성을 확보한 전시실.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면 층고가 3.3m에서 9.2m로 점차 높아지는 기둥 없는 공간이 나온다. 전시실이 다양한 층고와 무주공간으로 설계된 이유는 여러 크기의 작품을 제약 없이 연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실제 전시실은 전시 내용이 바뀔 때마다 몇 개의 가벽으로 나뉘거나 때로는 통간으로 바뀐다. 작년 7월에 열렸던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 전시 때는 전시실에 미로가 설치되기도 했다.

한 건축평론가는 조민석의 건축작업에 대해 “다른 두 종류가 서로 함께 있음으로써 서로를 돕는, 둘이면서 그와 동시에 둘을 넘어서는 더 큰 하나를 이룬다”고 평하며, ‘화쟁의 사유’를 언급했다(출처 ‘건축 없는 국가’, 이종건). 원효의 중심 사상인 ‘화쟁(和諍)’은 “서로 다른 이론을 인정하고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을 이루려는 이론”이다. 스페이스K에서 조민석이 보여주는 ‘화쟁의 사유’는 미술관이 자연과 인공, 공원과 도시, 곡선과 직선 사이의 균형을 넘어 유기체로서의 존재감으로 드러내면서 발현된다.

무기체인 건축이 유기체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건축가가 건물의 틈과 경계를 없애고 디테일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노출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은 거푸집을 고정하기 위한 폼타이(form tie) 구멍이나 거푸집 사이의 틈이 일종의 시그니처처럼 남는다. 그런데 스페이스K에서는 이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건물과 연결된 경사로나 계단에도 선명한 틈이 보이지 않고 경사로를 받치는 기둥도 없으며, 천창은 천장 구조 속에 숨겨져 있다. 외벽 마감재 패널이 반복돼 있는 주변 건물과 차별화되는 ‘무봉(無縫)’의 건물을 만들기 위해 조민석은 콘크리트를 한 번에 타설했다고 한다.

스페이스K에는 소장 작품이 없다. 그래서 모든 전시는 기획전으로 열린다. 주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해외 작가나 아직 주목받지 못한 국내 작가의 작품을 다루는데 그러다 보니 추상적인 현대 회화가 주를 이룬다. 커다란 추상화와 솔기 없는 건물을 번갈아 바라보다 보면 내가 유기체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런 느낌을 2022년에 열린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전시 때 가장 강렬하게 느꼈다. 붉은색의 꿀렁꿀렁한 형태가 그려진 이근민 작가의 그림은 마치 생물체의 내부 장기 같았다.

스페이스K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소는 2층에 전시실을 향해 뚫린 자그마한 창이다. 이 창을 통해 전시 작품과 폭 27m의 곡선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은 기획전이 바뀔 때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 풍경과 함께 늘 변한다. 그래서 스페이스K에 새로운 전시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리면 2층의 작은 창을 통해 이번에는 어떤 장면을 바라보게 될지 기대하게 된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