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천강에 펼쳐진 기이한 돌개구멍 바위 요선암 볼수록 신기/요선정 오르면 입체감 생생한 마애여래좌상 만나/단종 유배지 청령포엔 슬픈 역사 가득
신들이 방금 노닐다 갔나. 유유히 흐르는 푸른 강물 위에 여기저기 흩뿌려 놓은 이상한 모양의 노란빛 바위들. 마음 넉넉한 신이 오랫동안 정성 들여 깎고 또 다듬은 듯, 모난 곳 하나 없이 부드럽게 물결치는 바위는 볼수록 신비롭다. 감춰두고 혼자 꺼내보고 싶은 영월의 비경 요선암. 마음에 드는 바위 하나 골라 편안하게 앉아 강물에 발을 담근다. 뺨을 스치는 제법 선선해진 바람. 평화롭게 떠가는 하얀 뭉게구름. 발을 간지럽히는 물살 즐기다 보니 모난 마음 하나 둥글게 다듬어진다.
◆‘신들의 놀이터’ 요선암 가보셨나요
강원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리. 이름 한번 잘 지었다. 무릉도원이라니. 작은 오솔길 타박타박 걸어 가을 닮은 코스모스 한들한들하는 아담한 미륵암 앞마당 지나면 주천강이다. 강가로 다가서자 왜 무릉도원으로 부르는지 금세 고개가 끄덕여진다. 강 위로 드넓게 펼쳐지는 암반지대에 올라서면 곧바로 신들의 세계로 점프한다. 조각칼로 부드럽게 떠낸 듯, 표면이 움푹 팬 갖가지 기이한 모양의 바위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 풍경에 눈을 의심하게 된다.
옛사람들도 이런 풍경에 반했나 보다. 조선 명종 때 문예가이던 봉래 양사언이 평창군수로 재직하던 시절 이곳 풍경을 즐기며 바위에 ‘요선암(邀僊巖)’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뜻이다. 맑은 강에 기기묘묘한 커다란 바위들이 넓게 깔려 있어 한눈에도 신들의 놀이터처럼 느껴진다.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김귀주도 1767년 펴낸 가암유고(可庵遺稿)에 ‘요선암의 뛰어난 경치를 구경하고 싶다’는 내용을 담았다.
태기산에서 발원해 무릉도원면으로 들어와 흐르는 주천강과 사자산에서 발원한 법흥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이곳의 정식 이름은 ‘요선암 돌개구멍’으로 2013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돌개구멍은 지리학 용어로는 포트홀로 불리며 강바닥의 바위에 항아리나 원통 모양으로 난 구멍을 말한다. 요선암에는 다양한 형태와 규모의 돌개구멍이 하천 바닥 화강암반 위에 폭넓게 발달해 있다. 하천을 따라 운반된 자갈 등이 하천 바닥 암반의 갈라진 틈에 들어가 빠른 물살과 함께 소용돌이치면서 암반이 오목하게 패어 이런 독특한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요선정 올라 주천강을 보다
요선암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가 있다. 주천강을 굽어보는 요선정과 무릉리 마애여래좌상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헤치고 언덕을 오르면 입이 쩍 벌어지는 마애여래좌상이 등장한다. 암반 위에 놓인 높이 3.5m의 이상한 바위 하나에 통째로 마애여래좌상이 담겨있다. 바위 규모로 미뤄 먼 옛날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 같고 원래부터 같은 자리에 있던 바위를 캔버스 삼아 솜씨 좋은 이가 조각했으리라.
고려 시대 마애불로 자세히 보니 타원형 얼굴은 양감이 풍부해 박진감이 넘친다. 양어깨에 걸쳐 입은 옷을 두껍게 표현해 신체가 드러나 보이지 않으며 옷주름도 간략한 선으로 새겼다. 두 손은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펴서 손등을 보이고 왼손은 오른손과 평행하게 들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가 돋보인다. 연꽃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진 머리 광배와 몸 광배를 두 줄로 새겨 놓았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도 연꽃무늬가 또렷하다. 상체 표현이 사실적이고 전체적으로 양감이 뛰어난 이 불상은 고려 시대 영월 지역을 대표하는 마애불로 평가된다. 마애불을 옆에서 보면 금방이라도 바위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입체감이 생생하다. 마애불 뒤쪽 절벽에 서면 주천강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풍경이 장관이다.
마애불 앞은 석탑과 고풍스러운 요선정이 차지하고 앉았다. 비운에 쓰러진 조선 6대 임금 단종과 숙종, 영조, 정조에 얽힌 얘기가 전해진다.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돼 죽임을 당했는데 단종이 복권된 지 60년이 지난 1758년(영조 34)에 예조판서 홍상한이 영월 단종의 능을 살펴보고 영조에게 이런 보고를 올린다. ‘원주 주천 고을 청허루에 숙종의 어시(御詩)가 걸려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됐으니 중건해 다시 어제시를 걸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영월군 주천면은 예전에 원주목에 속해 있었다. 이에 영조는 아버지 숙종이 쓴 씨를 옮겨 쓰고 자신의 소회를 담은 글도 하사해 청허루에 걸었다. 나중에 정조도 숙종의 시에 운을 맞춘 시를 지으면서 청허루에는 세 임금의 글이 걸리게 됐다.
하지만 1909년 청허루는 허물어져 방치됐고 어제시 현판은 당시 주천의 헌병파견소 소장이던 일본인이 사들인다. 이를 되찾은 이들이 현재 무릉도원면의 주민들로 구성된 요선계 계원들이다. 이들은 1913년 무릉리에 요선정을 짓고 일본인과 교섭해 어제시 현판을 되찾아 요선정에 걸었다. 그런데 1928년 주천면에서 청허루를 다시 짓고 어제시 현판을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요선계는 주천면이 어제시 현판을 일본에 팔았으니 권리가 없다며 이를 거부했고 결국 소송 끝에 요선계가 승소하면서 세 임금의 어제시는 영원히 요선정에 남게 됐다. 요선계는 1600년대 이 지역에 거주하던 원주 이씨, 원주 원씨, 청주 곽씨가 요선암에 모여서 조직한 것으로 전해진다.
◆단종 슬픔 어린 청령포를 걷다
단종의 슬픈 역사는 그가 유배당한 청령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룻배 매표소 입구에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손을 잡은 작품 ‘천상재회’가 눈길을 끈다. 세종의 적장손이자 문종의 장남 단종은 조선 27대 왕 중 유일하게 원손∼세손∼세자∼왕을 모두 차례대로 거친 가장 정통성 있는 국왕이다. 하지만 모친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죽고 문종도 즉위한 지 2년3개월 만에 승하한다. 이에 홀로 된 단종은 1452년 12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뺏기고 17살이던 1457년 영월로 유배된 뒤 살해당하고 만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는 단종이 승하한 뒤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살았으며 1521년 81세로 한 많은 생을 마무리했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천상재회를 통해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을 이루고 영면에 들기를 기원하면서 영월군민들이 지난 4월 이 작품을 세웠다. 두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된 한 인간의 슬픔이 가슴속 깊이 밀려든다.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있는 단종 유배지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다.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어 사실상 섬이나 마찬가지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로 들어서자 원래 어소가 있는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 옆으로 단종 어소가 등장한다. 승정원일기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당시 모습을 재현했으며 단종이 머물던 본채, 궁녀 및 관노들이 지내던 행랑채로 이뤄졌다. 희한하게도 담장 밖의 소나무 한 그루가 90도로 허리를 꺾어 어소를 향해 절을 하고 있다. 원래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갈수록 어소를 향해 점점 기울어지더니 지금의 모습의 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높이 30m, 둘레 5m의 거대한 관음송(觀音松)이 등장한다. 단종이 유배 시절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고 한다. 수령 600년의 소나무는 단종의 유배를 고스란히 목격했고 그가 오열하는 소리도 들었기에 관음송이란 이름을 얻었다. 인근에는 ‘금표비’도 보인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돼 이곳에 유배되자 일반 백성의 출입을 금지하려고 세운 비석이다.
단종은 청령포에서 차로 5분 거리의 장릉에 묻혀있다. 단종은 살해된 뒤 동강에 시신이 버려졌는데 이를 영월의 호장 엄흥도가 몰래 수습해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했다.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알 수 없었는데 1541년(중종 36)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 묘역을 정비하고 1580년(선조 13)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단종의 삶처럼 장릉은 병풍석과 난간석도 없고 석물 또한 단출하다. 봉분 앞 상석 좌우에 망주석 한 쌍이 서서 쓸쓸한 왕릉을 지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