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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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헌재 마비, 국회의장이 막아야

1994년 재판관 추천 놓고 여야 충돌
6년 뒤 ‘여야 각 1명, 공동 1명’ 합의
170석 巨野, “2명 지명하겠다” 억지
20여년간 유지돼 온 관행 지켜져야

“권성씨는 한나라당에서 추천을 했고 김효종씨는 여야 공동으로 추천한 분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김대중(DJ)정부 시절인 2000년 9월8일 국회 본회의장. 이만섭 당시 국회의장이 권성, 김효종 두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 선출안을 표결에 부치기 전 이렇게 말했다. ‘여야 공동 추천’이란 표현이 눈길을 끈다. 원내 1당이자 야당인 한나라당(현 국민의힘)과 여당인 새천년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이 김 후보자를 재판관으로 뽑아 헌재에 보내기로 뜻을 모은 것이다. 여야가 정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작금의 국회와 비교하면 신선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헌법은 헌재소장을 비롯한 재판관 9명 가운데 3명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1988년 1기 재판부를 꾸릴 때에는 의석수로 상위 3개 정당이 1명씩 추천권을 행사해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1994년 2기 재판부 구성이 다가오며 여야가 이 문제로 정면 충돌한다. 김영삼(YS) 대통령이 총재이던 여당 민주자유당(현 국민의힘)은 국회 몫 재판관 3명 중 2명을 자기네가 추천하겠다고 우겼다. 반면 야당인 민주당은 여야가 1명씩 추천하고 나머지 1명은 여야 공동으로 추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당시 민주당 신기하 원내총무(현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직접 지명하는 재판관 3명을 포함하면 여당 몫이 전체 9명 중 5명이나 돼 헌재 구성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헌재 심판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감안하면 타당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김태훈 논설위원

민자당은 국회 의석수 차이를 들어 이를 뭉갰다. 그때 민자당 176석, 민주당 98석이었다. 민자당 이한동 원내총무는 “의석 비율로 봐 재판관 3명 중 2명은 당연히 민자당 몫”이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 총재인 YS의 생각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형적인 ‘다수의 횡포’였다.

DJ정부 들어 16대 국회가 개원한 2000년 여야는 드디어 국회 몫 재판관 3명 추천에 관한 합의점을 찾았다. 여야가 1명씩 추천하고 나머지 1명은 공동으로 추천하자는 것이다. 민주당이 야당이던 1994년 내놓은 제안이 6년 만에 받아들여진 셈이다. 다수당인 야당과 소수당인 여당 둘 다 조금씩 양보한 결과였다. 김효종 재판관을 시작으로 목영준(2006∼2012년), 강일원(2012∼2018년) 재판관도 여야 합의를 거쳐 헌재에 입성했다.

어렵사리 성립한 이 관행이 20여년 만에 깨질 위기에 놓였다. 오는 17일 6년 임기가 끝나는 국회 몫 재판관 3명의 후임자 추천을 놓고 민주당이 억지를 부리는 탓이다. 현 22대 국회는 민주당 170석 대 국민의힘 108석 구도다. 민주당은 “여야 간 의석수 차가 60석이 훨씬 넘는 만큼 당연히 민주당이 2명을 추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1994년 민자당의 오만과 어쩜 그리도 판박이인지 신기할 따름이다. ‘여야가 1명씩 추천, 나머지 1명은 공동 추천’이란 아이디어를 내 결국 관철한 세력이 지금의 민주당이란 점을 감안하면 몰염치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약자일 때는 ‘공정’과 ‘중립’을 외치다가 막상 강자가 되면 다수의 횡포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민주당의 정체성인가.

여야의 극심한 정쟁으로 국회 몫 재판관 3명이 공석으로 남으면 헌재는 기능이 정지된다. 재판관이 최소 7명은 있어야 헌재가 뭔가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줄기차게 나돈 ‘헌재 10월 마비설’이 현실화하는 것이다. 이 경우 헌재에 계류 중인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등 탄핵심판 사건들 선고는 무한정 미뤄질 수밖에 없다. 그저 헌재만의 마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부 부처, 더 나아가 대한민국 전체의 마비로 이어질 수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나서야 한다. 입법부 수장으로 취임하며 민주당을 탈당한 우 의장이 야당이나 이재명 대표 눈치를 볼 필요가 뭐가 있겠나. 어차피 22대 국회 임기가 끝나는 2028년이면 정계에서 은퇴할 몸이다. 우 의장이 앞장서 ‘여야가 1명씩 추천, 나머지 1명은 공동 추천’이란 원칙을 지켜낸다면 그 공로는 훗날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