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이 도널드 트럼프를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만나던 날, 그 풍경이 낯설고도 묘해서 오래 남았다. “축하한다”며 악수를 청하는 바이든의 손을 “고맙다”며 맞잡은 트럼프의, 마치 준비된 것 같은 ‘겸손’의 손! 그는 바이든의 손 밑으로 손을 잡았다.
현직 대통령이 다음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초대하는 미국의 전통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아름다운 전통이다. 그런데 우리는 4년 전을 기억한다. 21세기 미국에서 현직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대선 패배에 불복해 당선자를 초청조차 하지 않았던 사건을. 그 사건의 주인공, 트럼프가 돌아왔다. 트럼프의 귀환, 세상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선거 내내 민주주의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트럼프를 비판한 카멀라 해리스, 그 똑똑한 해리스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왜 미국은 사기, 성적 학대, 명예훼손 등으로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있는 트럼프를 선택했을까.
무엇보다도 바이든 정부에 대한 심판은 아니었을까. 치솟는 물가와 불법 이민자로 인해 흔들리는 서민들의 삶에는 눈감고 귀 막고, 옳은 말만 하는 지도층의 오만! 그런 정부의 대응이 트럼프 귀환에 징검다리를 놔준 것은 아니었을까.
나도 놀랐던 것은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의 해리스의 대응이었다. 바이든과의 차별점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 그녀는 어처구니없게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는데, 정말 떠오르는 것이 없어 난감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많은 시민이 물가 때문에, 일자리 불안 때문에 사는 게 힘들다고 하는데 떠오르는 게 없다니. 그런 해리스가 전면에 내세운 이슈는 낙태권이었다. 미국에서 여성들에게 낙태권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뤄지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낙태권만 강조한다고 여성들이 모두 해리스에게 표를 던질 것인가. 해리스 측에서는 분명히 전략의 문제가 있었던 오만한 선거였다.
트럼프는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안정적인 일자리와 물가, 그리고 위협적이지 않은 삶, 그가 미국민들의 두려움을 해소해 줄 힘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적어도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은 캠페인 문장 MAGA도 한몫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사업가로 평생을 살아온 자의 촉, 관념을 뛰어넘는 매직이었다.
트럼프는 자본주의 같다. 뼛속 깊이 장사꾼이고, 모든 것이 거래다. 그 거래의 파장은 크지만 규칙은 간단해 보인다. 그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 그의 리더십에 도움이 될 것인가. 그런 점에서 그에게는 일관성이라도 있다.
이제 우리가 그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않는 강력한 매파로 꾸려진 정부를 상대해야 한다. 무역적자를 해소하겠다며 트럼프는 벌써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 우리 기업들에 대해 보조금 축소를 예고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 한복판에서 바이든 정부를 선택하고 중국을 멀리해온 우리가 그 해법을 가지고 있을까.
분단국가에 살면서 반도가 아니라 섬이 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남북문제일 것이다. 지금처럼 남북이 서로 대화의 노력을 하지 않고 서로의 탓만 하며 갈등을 부추기는 방향으로만 간다면 어떻게 될까. 김정은과 접점이 있는 트럼프의 등장으로 한반도의 문제에서 우리가 패싱될 우려가 있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우리 문제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기막힌 일이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자존감이고, 슬픈 일은 자신의 주도권을 잃는 일이다. 그렇듯 국가에 있어 중요한 것은 리더십이다. 더구나 우리가 조우해야 하는 트럼프나 김정은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강하고 똑똑한가. 그 사이에서 어떻게 국민의 안위를 살필 수 있는지 고민하는 리더십은 이제 우리에겐 생존의 문제다. 제 가족, 제 정파의 안위가 아니라 한반도의 안위, 국민의 안위를 살필 수 있는 철학은 무엇이고, 전략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리더십이 절실해 보이는 때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