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춤, 모든 장르를 소화하는 전천후 연기력까지. 이정현(44)은 ‘만능 예능인’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드문 존재다. 15살 나이에 장선우 감독의 ‘꽃잎’(1996)으로 데뷔해 연기 천재라는 말을 들었고, 1999년 느닷없이 가수로 데뷔해 테크노 열풍을 일으켰다. 박찬욱·박찬경 감독이 제작한 단편 영화 ‘파란만장’(2011)에 출연하며 영화에 복귀했고, 이후 ‘범죄소년’(2012) ‘명량’(2014)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 ‘헤어질 결심’(2022) 등 영화에 연이어 출연했다. 올해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선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임명됐다.
전주영화제가 진행중인 2일 전주중부비젼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정현은 “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관객들과 함께 보고 1시간 동안 영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처음으로 주어졌다”며 “관객들과 호흡하며 대화를 주고받는 게 재미있고 행복하다. (올해의 프로그래머라는) 제안을 받아 감사하고 영광스럽다”고 웃었다.
그가 프로그래머로서 선정한 영화는 여섯 편이다. 우선 ‘복수는 나의 것’(2002, 박찬욱), ‘아무도 모른다’(2004, 고레에다 히로카즈), ‘더 차일드’(2005, 장-피에르·뤽 다르덴) 세 편을 꼽았다. 이정현은 “판타지나 헐리우드 상업 영화도 좋아하지만 사회 문제를 기반으로 한 영화가 더 와닿고, (영화로) 사실적인 이야기를 접할 때 더 큰 울림을 느낀다”며 선정의 변을 밝혔다. 나머지 세 편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들이다. 데뷔작인 장선우 감독의 ‘꽃잎’, 안국진 감독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박찬욱·박찬경 감독의 ‘파란만장’이다. 그가 선정한 영화들은 모두 빠르게 매진됐다.
이정현은 장선우·박찬욱 두 감독에 대한 각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장선우 감독님은 저를 배우로 있게 해준 분”이라며 “항상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 이후 영화 활동을 하지 않고, 제주도에 머물며 영화계 행사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장 감독은 이정현의 요청에 흔쾌히 이번 영화에서 ‘꽃잎’ 상영 후 진행되는 관객과의 대화(GV) 참석을 수락했다고 한다.
박찬욱 감독에 대해서는 “영화로 돌아오게 해준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꽃잎’ 이후 좋은 연기자로 성장하고 싶었지만 많은 대본이 들어오지 않았고, 연기에 목마른 상태에서 가수로 데뷔한 이후에는 가수 이미지 때문에 시나리오가 더 안 들어왔다”며 “2011년 사석에서 박찬욱 감독을 만났는데 ‘왜 연기를 하지 않느냐’고 하시더라. 이 자리가 인연이 되어 ‘파란만장’ 출연 제의를 받았다”고 말했다.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단편 황금곰상을 수상한 이 영화 덕에 이정현은 다시금 많은 감독들의 러브콜을 받게 됐고, 배우 경력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2011년 사석에서 우연히 만난 박찬욱 감독님이 ‘당신은 배우다’. ‘영화 ‘꽃잎’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이후 VHS로만 존재하던 ‘꽃잎’ 영화를 DVD로 10장을 구워 선물로 주셨어요. 제가 배우라는 걸 잊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배우를 하라고 말씀하시면서요.”
이정현은 연출 데뷔작인 단편 ‘꽃놀이 간다’로 올해 전주영화제 ‘코리안 시네마’ 섹션에 초청받은 감독이기도 하다. 2022년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80대 노모와 50대 아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숨진 지 한 달 만에 발견된 ‘창신동 모자 사건’을 모녀의 비극으로 변주한 영화다. 그가 2022년 대학원(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 1학기 재학 때 만든 작품으로 각본·연출·주연을 모두 책임졌다. 제작비 500만원의 저예산 영화인만큼 그는 촬영장의 막내로 모든 잡일까지 전천후로 맡았다. 영화 ‘반도’(2020)로 연을 맺은 연상호 감독의 스태프들이 손을 보태기도 했다.
그는 “생활형 범죄를 저지르는 가족 이야기를 다루는 다음 단편 영화 (촬영을) 다음 달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편영화도 찍고 싶은 마음이 크다. 장편을 찍기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열심히 준비한 후 도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학부(중앙대 영화학과 98학번)에서도 영화 연출을 전공했지만 그때는 제 시야가 넓지가 않았어요. 철도 없었고요. 40대에 접어들어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며 세상을 보는 관점이 풍부해졌습니다. 이해력이 커지고, 공감대도 넓어졌죠. 책임감도 좀 더 강해진 것 같아요. 만약 ‘꽃놀이 간다’ 같은 영화를 제가 20대 때 찍었다면 아마 촬영하다가 (힘이 들어서) 그냥 도망갔을 것 같아요.(웃음) 40대가 되어 이렇게 영화를 찍으면서 일단 마음이 너무 편해졌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