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 들어선 중년 남성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대기업 임원이었다. 십여 년 동안 일하며 남들이 부러워할 위치에 올랐지만, 내면의 불안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말투는 차분했고 태도는 침착했지만, 그는 보고를 할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목소리가 떨릴까 봐 불안하다고 했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있는 날이면 전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보내고, 발표가 끝난 뒤에는 몸살을 앓곤 했다. 이런 긴장 때문에 회사에 다니는 일이 고역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사회불안장애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과도한 공포가 핵심 심리인 질환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당하지 않을까, 비난받지 않을까, 혹은 남들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끊임없이 신경을 쓰고 긴장한다. 타인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는 상황을 견디기 어려워하며, 그래서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려고 과도하게 애쓰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 함께 있는 일은 즐거움이라기보다 고역이고, 혼자 있는 시간을 훨씬 편하게 느낀다.
사회불안장애는 대체로 청소년기에 시작한다. 이후 증상은 악화와 완화를 반복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약해지는 경과를 보인다. 그러나 장년층에서도 사회불안으로 고통받는 사례가 적지 않다. 흔히 “나이 지긋한 어른이 사람을 어려워할 리 없다” “성공한 사람이 불안에 떨 리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55세 이상 장년층에서도 유병률이 약 5%에 이를 정도로 드물지 않다.
장년층 환자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승진 실패나 실직, 건강 문제 같은 충격적 사건을 경험한 뒤 증상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실수나 실패를 다른 사람이 목격하게 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주변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면서 점차 사람을 피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나이가 많고 직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회사 임원이나 대표 역시 발표를 앞두고 불안해하며 안정제를 찾는 경우가 있다. ‘자존감을 키우고 당당해지자’고 마음먹어도, 생각만으로 불안이 해소되지 않는다.
회의나 발표에서 어느 정도의 긴장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단순한 긴장을 넘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땀을 흘리며, 얼굴이 붉어지고, 손이 떨리거나 말을 더듬을 정도라면 사회불안장애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고, 밥을 먹고, 글을 쓰는 것조차 두려워 회피한다면 문제다. 불안 때문에 일이 자꾸 엉키고, 의미 있는 기회가 찾아와도 불안 때문에 거부해 버린다면, 이것은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신호다.
호흡법과 심상 훈련을 익혀두면 좋다. 발표 전에 복식호흡을 하며 “나는 잘할 수 있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어보자.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 보면, 실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뇌가 그 경험을 익숙하게 인식해 긴장을 덜 느끼게 된다.
적당한 긴장을 품은 채 의미 있을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가는 것 자체가 바로 치료다. “불안을 느낀다는 건, 더 잘하고 싶은 열망이 내 안에 있다는 뜻이구나”라고 자기감정을 해석할 줄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불안해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불안을 완전히 몰아내려 하기보다, 비록 흔들리더라도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기르는 것. 이것이 바로 치료의 궁극적인 목표다.
김병수 정신건강전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