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떤 사람은 또래보다 늦게 늙는 걸까. 60대가 되어도 걸음이 가볍고 일상이 또렷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50대부터 기억력 저하나 신체 기능 변화가 눈에 띄게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같은 연령대 안에서도 노화 속도가 크게 다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가설이 제시됐지만, 공통된 결론을 얻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국제학술지 네이처 노화(Nature Aging)에 실린 대규모 연구 결과가 이 오래된 질문에 새로운 단서를 제시한 것으로 15일 확인됐다. 연구진은 고령층의 일상에서 널리 관찰되는 한 활동이 노화의 진행 속도와 통계적으로 유의한 관련성을 보였다고 보고했다.
이 연구는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의 아구스틴 이바녜즈 교수가 이끄는 국제 공동 연구팀이 수행했다. 연구진은 유럽 27개국에 거주하는 8만6149명(평균 연령 66.5세)의 자료를 분석해 생활 습관과 생물학적 노화 사이의 연관성을 정량화했다.
이를 위해 실제 나이와 건강·생활 습관을 기반으로 예측된 나이의 차이를 나타내는 ‘생체행동적 연령 격차(biobehavioral age gap)’ 지표를 활용했다. 예측 나이가 실제보다 높으면 ‘가속 노화’, 낮으면 ‘지연 노화’로 분류된다. 분석에는 기능적 능력, 교육 수준, 인지 기능, 심혈관 질환, 감각 손상 등 노화와 관련된 여러 요소가 포함됐다.
연구 결과 일상에서 두 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즉 다언어 사용자는 단일 언어 사용자보다 생물학적 노화가 더 천천히 진행되는 경향을 보였다. 한 시점을 기준으로 비교했을 때 다언어 사용자의 가속 노화 위험은 약 54% 낮았고, 여러 해에 걸쳐 변화를 추적한 분석에서도 이 위험이 약 30% 낮게 나타났다.
이를 역으로 환산하면 일정 기간 동안 단일 언어 사용자가 가속 노화에 해당할 가능성이 다언어 사용자보다 약 43% 높은 셈이다. 연구진은 연령과 교육 수준, 언어 환경, 신체·사회적 요인을 보정한 뒤에도 이러한 차이가 통계적으로 유의한 수준으로 유지됐다고 밝혔다.
노화는 전 세계 고령화와 함께 오래전부터 주요 보건 과제로 다뤄져 왔다. 인지 기능 저하나 신체 능력 감소를 늦출 수 있는 요인을 찾기 위한 연구도 지속돼 왔지만, 그동안은 표본 규모가 작거나 특정 임상 집단에 한정된 경우가 많아 결과를 일반화하기 어려웠다. 이바녜즈 교수팀은 이번 연구가 8만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자료를 활용해 다언어 사용과 노화 속도의 관련성을 보다 안정적으로 검토했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의 한계를 보완한다고 설명했다.
다언어 사용이 노화 속도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는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여러 언어를 이해하고 전환하는 과정에서 기억력, 주의 전환, 실행 기능 등 다양한 인지 기능이 동시에 활성화된다는 점은 다수의 인지과학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보고돼 왔다. 연구진은 이러한 인지 자극이 누적될 경우 장기적으로 뇌 기능 유지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인지 저하와 치매 위험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요인으로, 일상 속에서 꾸준히 인지 활동을 이어가는 것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언급해 왔다. 미국 국립노화연구소(NIA) 역시 노년기 인지 건강을 위해 학습과 사고, 기억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언어를 바꿔 쓰거나 복잡한 문맥을 이해하는 과정이 반복되는 다언어 환경은 이러한 인지 활동을 자연스럽게 유지하는 생활 습관 중 하나로 연구자들 사이에서 주목돼 왔다.
이번 연구는 고령층의 인지 건강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정책을 검토할 때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연구진은 다언어 사용이 특별한 도구 없이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습관이라는 점에서, 고령층의 뇌 건강을 보호하는 전략을 설계할 때 하나의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연구팀은 이번 연구가 다언어 사용이 노화를 지연시키는 직접적 원인을 규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언어 활동과 인지 기능, 사회적 자극, 생활 습관 등 여러 요소가 함께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구체적인 작용 경로를 확인하려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