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민 국가유산청장은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세계일보와 만나 종묘 앞 초고층 개발 사업을 둘러싼 서울시와의 갈등에 대해 “세계유산을 보호하면서도 국민 수요와 경제성장을 함께 고려해 ‘보존과 개발의 접점’을 찾는 균형의 문제”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이날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가 종묘 앞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에 우려를 표하며 ‘한 달 내 의견과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한 답신 시한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허 청장은 “서울시로부터 실질적인 회신을 받지 못했다”고 잘라 말했다. 국가유산청이 이달 초 독촉 공문을 보낸 끝에 서울시로부터 이날 저녁 받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서한 관련 중간 회신 및 회의 개최 요청’ 공문에도 유네스코가 요구한 사업 설명이나 자료는 담기지 않았다. 대신 서울시는 허 청장과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오세훈 서울시장 간 조정회의 개최를 요구했지만 지난 국장급 예비조정회의에서 진척이 없었던 만큼 이르면 연내 제2차 예비조정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이처럼 세운4구역 개발 논란이 장기간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만큼 HIA라는 국제적 절차를 거쳐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국가유산청의 입장이다. 허 청장은 18일 재입법예고한 ‘세계유산 보존·관리 및 활용에 관한 특별법(세계유산법) 시행령’ 개정안도, 서울시가 주장하는 ‘규제 확대’가 아니라 개발을 사전에 평가해 절충점을 찾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개정안은 국제적으로 활용돼온 HIA 가이드라인을 법제화해 제도권으로 정착시키는 시도로, 해외에서도 전례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개발 압력이 큰 대도시 세계유산을 보유한 국가들에선 유산 보존과 재개발의 충돌이 반복되는 만큼, 한국의 법제화 시도가 향후 유사 분쟁에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허 청장은 “그동안 국내법 절차가 없다는 이유로 HIA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 반복돼 왔다”며 “세계유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업을 어떻게 평가할지 방법론을 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서울시가 ‘강북 죽이기’라는 프레임을 꺼내든 데 대해 허 청장은 유감을 표했다. 그는 “지역·지형·세계유산의 가치에 따라 평가 기준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며 “일률적인 거리 규제나 높이 제한을 두는 제도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세계유산법 어디에도 100m나 500m 같은 획일적인 반경 규제는 없다”며 “지역 유불리를 떠나 해당 지역에 맞는 합리적인 평가를 하려는 것인데 강북 전역을 규제한다는 프레임은 논리에 맞지 않다”고 꼬집었다. 오 시장이 “종묘가 세계유산 지위를 잃을 일은 없다”는 취지로 언급한 데 대해서는 “HIA 등 여러 검증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지위를 단정하는 건 위험한 발언”이라고 선을 그었다.
내년 7월 부산에서 열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1988년 세계유산협약 가입 이후 처음으로 한국이 개최하는 회의인 만큼 북한을 초청해 평화 메시지를 내겠다는 의지도 재확인했다. 허 청장은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유네스코 사무총장과 세계유산센터장 등으로부터 북한 초청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의사를 확인했다면서 “행사 하루 전날까지도 북한 참가 의사를 기다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북한 참석이 성사될 경우 평화와 협력 의지를 담은 국제선언문이 채택될 것이라며 “세계유산위원회 개최국이자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이곳에서 유네스코 정신에 기반한 평화 메시지가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금강산을 둘러싼 북한과의 협력 구상도 제시했다. 허 청장은 과거 남북이 협력 복원을 합의했지만 중단된 금강산의 유점사 복원 사업을 거론하며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 조계종 등 민간 단체도 역할을 할 여건을 고민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통일부, 외교부와의 교감은 물론 국가유산청이 문화·역사 자원을 매개로 민간 교류와 유산 협력의 실행 기반을 차근차근 구축하겠다는 설명이다.
허 청장은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조선인 강제노역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는 일본 사도광산 문제를 의제로 올리겠다고도 언급했다. 그는 “한·일관계는 해결할 건 해결하고 나머지는 협업해 미래로 가야 한다”는 전제를 제시하면서도 강제동원 문제는 국제 기준에 따라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분담금과 해외 문화유산 지원 등에서 일본이 축적해온 네트워크를 고려하면, 내년 부산 회의에서 실질적 토론과 후속 조치를 끌어내기 위해 외교부와의 긴밀한 공조와 사전 외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