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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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억칼럼] 역사가 권력에 물들면

입력 : 2025-12-22 22:59:57
수정 : 2025-12-22 22:5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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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대통령 ‘4·3’ 언급으로 논쟁 촉발
과거에도 건국절·국정교과서로 갈등
역사는 정치 논리에 끌려가면 안 돼
정부, 순수한 학문 지원에 머물러야

문재인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6월1일 대통령의 발언은 갑작스럽고 엉뚱했다.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자신도 “약간 뜬금없는 이야기”라고 운을 뗐다. 그러더니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정리하고 있는 지방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꼭 좀 포함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형식은 요청이었지만, 사실상 지시나 다름없었다.

이후 ‘모든 길은 가야사로 통한다’는 말이 돌 정도로 광풍이 불었다. 조금이라도 연고가 있는 지방자치단체들은 가야사 복원 관련 예산을 신청했다. 경남과 경북, 전남 곳곳에서 가야 유물이 출토됐다는 지자체와 학계의 발표가 언론을 장식했다. 그러다 보니 ‘가야사 복원’ 코드에 맞추려고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유적과 유물을 가야사의 일부로 소개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5세기 신라 유물이 가야 유물로 둔갑하고 있다는 개탄도 들렸다. 철저한 고증 없이 정치권력의 입맛에 맞춰 역사 연구가 진행된 것이다.

박창억 논설실장

역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확인하려는 권력은 역사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재구성하고 싶어한다.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소외됐던 가야사 복원 노력만 해도 “가야사 복원은 우리 모두와 정부의 책임”이라고 강조한 김해 김씨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정권 차원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 바 있다. 역사 해석이나 기술에 권력 의지가 투영된 사례다.

역사 재해석 시도는 굴곡진 현대사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노무현정부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등 과거사 청산에 집중했다. 이명박정부는 ‘8·15 건국절’ 제정을 시도해 이념 논쟁을 격화시켰고, 기존 교과서가 좌편향되어 있다는 인식 아래 수백 곳을 뜯어고쳤다. 박근혜정부 역시 역사교과서 집필에 뉴라이트 계열 필자들을 대거 포함시켰고, 아예 한국사 교과서를 국가가 직접 발행하는 국정교과서로 바꿔 버렸다. 당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논란은 온 나라를 ‘이념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엄격한 고증과 전문가 해석이 필수적인 역사 문제에 정치권력이 개입할 때의 혼란은 다른 정권에서도 끊이지 않았다. 문재인정부는 6·25전쟁 수훈자인 백선엽 장군이 별세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자 안장자 정보에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표기해 논란을 샀다. 윤석열정부는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을 문제 삼아 육사에 설치된 홍 장군 흉상을 이전하려고 시도하며 갈등을 빚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제주 4·3사건 당시 진압을 위해 파견됐던 고(故) 박진경 대령(1920∼1948)의 국가 유공자 지정 취소를 검토하라고 지시하며 논쟁을 불을 지폈다. 박 대령의 공과 판단은 쉽지 않다. 정부 공식 문건인 ‘제주 4·3사건 진상 보고서’(2003년)에도 “폭도 토벌보다 입산한 주민들 하산 작전에 중점을 뒀다”는 평가와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나란히 실려 있다. 명확한 근거가 부족한 사안을 섣불리 건드리는 것은 자칫 또 다른 ‘역사 전쟁’으로 번질 우려가 크다. 위서로 판명된 ‘환단고기’를 최근 공식회의에서 언급하고, 지난 10월에는 여순사건의 배경을 ‘정당한 항명’이라고 설명해 논란을 부르는 등 이 대통령의 행보는 역대 어느 대통령 이상으로 역사 재해석에 적극적이다.

정부 주도의 역사 연구는 정치 논리에 오염되기 쉽다. 권력자가 특정 역사를 동원하고, 자기 이념과 색깔에 맞게 재단하면 사실(fact)은 사라지고 팩션(faction-사실과 허구가 혼합된 스토리)만 남게 된다. 그 과정에서 역사에서 얻을 교훈은 증발하고 사회적 분열이라는 부작용만 양산될 뿐이다. 역사는 오롯이 학계의 몫으로 맡겨 놓아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학술적 연구가 균형 있게 이뤄지도록 지원하는 데 그쳐야 마땅하다.

현재 우리는 고환율과 고물가, 심각한 가계 부채, 청년 실업, 북핵 위협, 동북아 질서 급변 등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노동·연금 개혁과 AI(인공지능) 등 첨단기술 경쟁, 국가 부채 등 시급한 과제도 쌓여 있다. 이런 시기에 역사 문제를 건드려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은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