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세계를 주도하려는 경쟁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결만 눈에 띄고 유럽은 사라진 듯하다. 2025년 뜨겁게 달아오른 AI 경쟁에서도 미국의 오픈AI나 구글, 중국의 딥시크가 화두로 떠올랐지만, 유럽은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는 처지다. 미국이 빛나는 태양이고 중국은 떠오르는 태양이라면 유럽은 지평선으로 저물어가는 석양 같다.
국제질서의 세력 변동에 민감한 한국에서도 미국이나 중국의 역동성에 감동하면서 박물관처럼 경직되어 과거의 영광만 되씹는 유럽은 열외로 취급하며 무시하는 추세다. 이번 달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이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도 유럽의 쇠퇴를 지적하며 과도한 규제가 창의적 기업정신을 짓밟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과연 유럽은 세계의 경쟁 구도에서 낙오하여 멸시해도 되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일까.
세계 질서의 정확한 그림을 그리려면 몇 가지 오해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선 강대국과 부국을 혼동하면 곤란하다. 2025년 예상되는 국내총생산(GDP) 총액을 비교하면 미국(27조달러), 중국(20조달러), 유럽연합(17조달러)이 세계 경제의 3대 강국이다. 부자 나라라면 1인당 GDP을 봐야 한다. 중국은 1만4000달러로 가장 낮아 개발도상국 수준이다. 반면 미국은 9만달러에 육박하며, 유럽은 4만6000달러로 미국의 절반 수준이다. 큰 그림에서 유럽은 중국보다 여전히 더 잘살아도 미국 소득과는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두 번째 오해는 GDP가 높으면 실제로 그만큼 더 잘산다는 생각이다. 주(駐)유럽연합 미국 대사는 가난하기로 유명한 미국의 미시시피나 웨스트버지니아의 소득 수준이 유럽의 선두 주자인 독일보다 높다고 최근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유럽보다 훨씬 높은 미국의 물가를 고려하면 구매력의 차이는 크게 줄어든다. 환율만 적용하면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유럽보다 두 배 정도 높지만 실제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비교하면 1.4배 더 높을 뿐이다.
마지막 오해는 이런 차이가 미국의 더 효율적인 생산시스템 덕분이라는 환상이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실제 서유럽의 시간당 생산성은 83달러로 미국(81달러)과 비슷한 수준이다. 후발주자 동유럽을 포함한 유럽연합 평균 생산성도 시간당 71달러로 미국보다 조금 낮을 뿐이다.
이런 오해를 털어내 버리면 조금 더 명확한 그림이 보인다. 유럽은 미국과 경쟁 가능한 생산성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유럽은 미국보다 훨씬 많은 휴가(최소 4주)가 보장되며 연간 평균 노동시간이 1600시간으로 미국의 1800시간보다 적은 편이다. 유럽인들이 미국과는 다른 사회경제 모델을 선택한 결과이며 덕분에 유럽인은 미국인보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가족이나 친구와 교류하며 삶을 즐길 시간이 더 많다.
유럽 경제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은 혁신 산업에서 충분한 역동성을 보여주지 못하며 중국의 추격으로 제조업에서 거의 밀려나는 형국이다. 그래도 유럽은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면서 의료, 환경, 교육, 문화에서 삶의 질을 추구하는 균형을 잡는 데 성공했다. 창조적 파괴의 첨단을 달리지는 못하더라도 풍요와 인간적 삶을 맞춰 나가는 사회경제 모델로 충분한 저력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