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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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해서 오히려 ‘FUN’… 다음 입장 줄을 서시오 [S스토리-K극장가 신주류 ‘J애니메이션’]

입력 : 2025-12-27 17:47:41
수정 : 2025-12-27 22: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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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칼 무한성편’ ‘체인소맨 레제편’
2025년 박스오피스 2·5위가 일본 작품
“생소함보다 예상 가능 쾌감에 열광”

유튜브·SNS 노출로 화제성 극대화
오타쿠 문화·1020 취향저격 효과도
문법 전형화된 韓 영화계에 시사점

2025년 한국 극장가 승자는 명확하다. 실사 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이 박스오피스를 장악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무한성편’)은 한국형 휴먼 코미디 ‘좀비딸’을 눌렀고,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레제편’)은 할리우드 대작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을 제쳤다. 여기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 2’가 최강자로 가세하며 올해 박스오피스 구도를 완성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 2’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올 1월부터 이달 24일까지 박스오피스 1·2·5위가 애니메이션 작품이었다. 25일 700만명을 돌파한 ‘주토피아 2’가 1위, 2위 ‘무한성편’(568만5419명), 5위 ‘레제편’(342만6517명) 순이었다. 상영점유율, 좌석판매율 등 주요 지표에서도 애니메이션 강세가 뚜렷하다. 올해는 애니메이션이 한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톱5에 세 작품이 포함된 첫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장르적 스펙터클로 관객을 끌어당겼다면, ‘주토피아 2’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여전한 대중성과 완성도를 갖고 있음을 증명했다. 왜 애니메이션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한국 텐트폴 대작을 제치고 극장에서 봐야 하는 ‘확실한 선택지’로 선택받았는지 그리고 세 편의 애니메이션이 어떤 방식으로 관객의 감정을 사로잡았는지. 이 질문을 회피한 채 한국 영화계가 내년을 준비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예측 가능한 스펙터클의 즐거움

 

‘주토피아 2’의 흥행은 슈퍼 IP의 힘에서 시작됐다. 2016년 개봉해 국내에서 470만 관객을 모은 전작 세계관과 캐릭터, 이야기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사건과 캐릭터를 더해 프랜차이즈 지속성을 강화했다. 관객에게 예측 가능한 즐거움을 제공하며 팬들 사랑을 재확인했다.

 

이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흥행 공식과도 맞닿는다. 과거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입점에 소극적이던 일본 TV애니메이션(TVA) 시리즈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전후해 넷플릭스 등 플랫폼으로 유입되며 한국 관객에게 크게 친숙해졌다. ‘귀멸의 칼날’ 극장판은 TVA 팬덤을 극장으로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애니메이션 매거진 ‘쿄로쿄로’의 김은빈 대표는 “이번 ‘무한성편’은 TVA 이후 이야기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팬 입장에선 ‘당연히 극장에서 봐야만 하는’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극장판은 친숙한 세계관에 스케일을 더한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성상민 대중문화평론가는 “TVA는 회당 20∼30분이라 액션의 호흡이 짧을 수밖에 없지만, 극장판은 TVA의 친숙함을 유지하면서도 스케일을 확장해 관객을 매료하기 용이하다”고 분석했다.

 

관객들은 완전한 새로움보다 이미 학습한 세계관에서 예상 가능한 쾌감을 맛보고 싶어 한다. ‘아는 맛’의 보장된 즐거움을 택한다. 김경수 영화평론가는 “실사 액션영화는 CG가 언제, 어떻게 터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반면, 일본 애니메이션은 스킬 사용이 정형화돼 있어 ‘이 대목에서 이런 스펙터클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볼 수 있다”며 “그 안정감이 즐거움을 더한다”고 설명했다.

 

◆SNS와 팬덤, 관객 참여의 선순환

 

‘아는 맛’의 쾌감이 팬덤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면, 애니메이션은 온라인에서 관객층을 확장했다. 애니메이션 팬들은 영화 리뷰 영상뿐 아니라 2차 창작 콘텐츠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하고, 댓글과 팬아트, 밈으로 확산시키며 바이럴을 일으켰다. ‘주토피아 2’와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모두 이 구조를 활용하며, 온라인에서의 관심과 참여가 극장 흥행과 직결되는 선순환을 만들어냈다.

 

‘주토피아 2’의 경우, 전작에서 우정을 나누는 파트너로 등장한 토끼 주디와 여우 닉은 이번 작품에서 갓 사귀기 시작한 커플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관계성’에 주목한 팬덤은 두 캐릭터를 귀엽게, 혹은 로맨틱하게 묘사하는 팬아트를 SNS에 활발히 공유했다. ‘주토피아 2’가 패러디한 ‘라따뚜이’, ‘샤이닝’ 등 수많은 작품 장면을 찾아내는 놀이도 SNS에서 벌어졌다. 관객 참여와 N차 관람을 촉진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셈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무한성편’)

일본 애니메이션 역시 인스타그램·유튜브 등 SNS에서 노출을 늘리며 대중과의 접면을 넓혔다. 영화·만화 평론가 수차미는 “한 번쯤 관련 바이럴에 노출되지 않아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유저들은 이를 자신의 취향을 대변할 스펙터클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설명했다. 유튜브가 발표한 ‘2025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주제’에 ‘귀멸의 칼날’, ‘진격의 거인’이 포함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극장판 영화 리뷰 영상뿐 아니라 2차 창작, TVA 내용을 다루는 콘텐츠도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영화와 SNS가 서로를 증폭하는 선순환 구조를 보여주었다.

 

유튜브·OTT를 통한 ‘같이 보기’ 문화 역시 확산하고 있다. 구독자 303만명의 유튜버 침착맨이 티빙 라이브 방송에서 ‘귀멸의 칼날’ 1기(26화) 전편을 10시간 동안 시청하는 콘텐츠에 팬들이 열광적으로 참여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홍수정 영화평론가는 이를 ‘작품을 중심으로 한 소속감’이라고 설명하며, 특정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느슨하고 즐거운 정서를 형성했다고 평가했다.

 

◆‘레제편’ 흥행이 보여준 관객의 변화

 

‘주토피아 2’, ‘무한성편’은 이른바 ‘대중픽’으로서 흥행이 예견됐던 반면, 폭력성과 선정성이 강하고 암울한 정서가 짙은 ‘레제편’ 흥행은 이변으로 평가된다. 이는 한국 관객의 서브컬처 수용도가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홍 평론가는 “소재가 신선하고 스토리가 견고하다면, 관객들은 서브컬처 장르에도 관대하며, N차 관람도 불사한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선악이 분명하고 직선적인 ‘귀칼’과 달리, ‘체인소 맨’은 메시지와 서사가 더 복잡한, 한마디로 더 서브컬처스러운 작품인데도 대중적으로 성공했다”며 “‘귀칼’ 이후 애니메이션에 대한 대중적 이해도가 높아졌고, ‘심연’을 건드려줬으면 하는 관객의 욕망을 ‘레제편’이 해소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애니메이션 주 소비층인 1020세대와 애니메이션의 정서적 친연성도 흥행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김 대표는 “애니메이션 분야는 공급자와 소비자 모두가 ‘진정성’을 가지고 특정 분야를 파고드는 ‘진심의 문화’를 오랫동안 구축해왔고, 그 정점에는 오타쿠 문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20년 전만 해도 오타쿠라고 하면 ‘좀 이상한 애’ 취급을 받았지만, 오히려 지금은 젊은이들이 오타쿠가 되고 싶어 하며, ‘패션 오타쿠’(오타쿠로 보이고 싶어서 오타쿠 행세를 하는 사람들을 낮잡아 부르는 용어)라는 표현까지 쓰인다”고 덧붙였다.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레제편’)

◆신선한 소재와 탄탄한 서사, 극장 흥행의 공식

 

그렇다면 요즘 관객이 극장을 찾는 기준은 무엇일까. 홍 평론가는 ‘좀비딸’, ‘F1 더 무비’, ‘주토피아 2’ 등 올해 흥행작들 모두 ‘독특한 소재’와 ‘탄탄한 서사’를 겸비한 작품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요즘 관객들은 단순히 ‘큰 스크린에서 봐야 할 때’보다 ‘확실한 재미가 보장될 때’ 극장을 찾는다”며 “적당히 즐길 콘텐츠는 (극장 밖에도) 너무 많기 때문에 극장에서는 확실한 재미를 기대하는데, 일본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지금 관객이 원하는 ‘신선함과 완결성’을 제대로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주토피아 2’의 흥행 역시 이런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주토피아’ 시리즈는 단순히 말하는 동물이 등장하는 또 하나의 디즈니 영화가 아니다. 제목과 달리 결코 유토피아가 아닌 도시 ‘주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아이러니한 서사는 독보적으로 독특하며, 편견과 공포, 갈등을 부추기는 지하 음모가 존재하는 도시에서 펼쳐지는 치밀한 서사는 성인 관객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면 올해 애니메이션 돌풍에서 한국 영화계가 얻을 시사점은 무엇일까. 김 평론가는 “천만 영화 공식을 벗어나 신선하고 과감한 중·저예산 기획이 필요하다”며 “지금의 한국 영화는 문법이 너무나 전형화돼 패턴이 뻔하게 읽힌다는 느낌, 뚜껑을 열어보기도 전에 관객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고 지적했다.

 

성 평론가도 “무엇이 통할지 알 수 없는 시기일수록 시도가 다양해야 한다”며 “이미 여러 번 봤던 소재와 공식을 답습하면 관객은 계속 외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영화계에 좋은 감독과 이야기 자원이 없는 게 아니다”라며 “이들에게 기회와 관심이 집중되도록 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