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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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기쁨으로 봉인됐던… 삶을 뒤흔드는 파열

입력 : 2025-12-29 21:30:00
수정 : 2025-12-29 1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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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2. 에피듀럴 모먼트: 생명의 파고 출산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개인의 몸과 삶을 뒤흔드는 파열의 경험이다. 이은실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리는 개인전 ‘파고’에서 생명의 탄생이라는 축복의 이미지 이면에 찢기고 파편화하며 생사의 경계를 홀로 통과하는 여성의 내면을 응시한다. 10점의 신작을 통해 담긴 출산의 기억은 여성의 서사를 넘어 모든 생명이 통과해야 하는 ‘파고’이자 인간의 고통과 회복 가능성을 함께 묻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이은실은 오래도록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출산의 기억을 이번 전시에서 처음 전면에 꺼내들었다. 작가는 출산을 ‘축복’과 ‘기쁨’이라는 말로 봉인해 온 사회적 규범의 껍질을 벗기고 파도와 용암, 소용돌이와 안개로 가득한 풍경을 불러왔다. 삶의 큰 변곡점을 파도의 높이에 비유한 전시 제목처럼 화면마다 서로 다른 높이와 속도의 파고가 몸을 스쳐 지나간다.

'에피듀럴 모먼트'

1층 전시장의 대작 ‘에피듀럴 모먼트’는 폭 7.2m 화면 위에 안개 낀 산맥과 그 위를 휘감는 용의 몸을 얹어 놓는다. 금빛 비늘 사이사이로 드러난 해체된 뼈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기운은 통증과 환각이 엉겨붙은 산통의 시간을 되살린다. 출산을 둘러싼 수많은 신화와 규범 역시 산모를 덧칠하는 또 하나의 사회적 마취가 읽힌다.

‘멈추지 않는 협곡’과 ‘생사의 기로’에서 피는 거대한 협곡을 가로지르는 붉은 용암이 된다. 깊은 곳에서 치밀어오르는 압력과 출혈은 대지를 가르는 균열과 끓어오르는 용암의 흐름으로 번역된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모체의 투쟁이 자연의 비경으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푸른 안료를 여러 겹 쌓아 올린 ‘전운’은 수면 위에 맺힌 소용돌이로 폭풍 전야의 긴장을 드러낸다. 아직 닥치지 않은 통증의 그림자, 멀리서부터 몰려오는 파도 소리가 화면 가장자리에서 서서히 번진다.

출산이 곳곳에 남긴 상흔들도 화면 한가운데로 불려 나온다. 절개 자국과 터져 버린 실핏줄, 시간이 지나 옅어졌지만 사라지지 않는 선들이 수묵의 농담 속에서 또렷이 부상한다.

이은실은 출산 이후 작업실로 “겨우 기어 나왔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는 출산을 둘러싼 미화된 언어를 걷어내고, 인간 존재가 겪는 고통과 회복의 가능성을 담담히 응시하도록 이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던 기억은 영웅적 증언도, 비극의 고백도 아닌 다른 이들의 상처에 공명하는 매개가 된다. 전시는 내년 1월3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