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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치듯 빈틈없는 서사보다 숨쉴 ‘틈’이 독자와 세계 연결” [창간37-제22회 세계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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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스물한 살 여성 도발 성인식 ‘M’ 인상적
‘허용 오차 범위’ 수명 알고 사는 삶 독특

두 인물의 우정을 담은 ‘유리 조각 시간’
인물·배경 섬세한 표현 흡입력 돋보여
완독 후엔 여운… 문학의 힘 보여준 작품

이끌리는 소설은 빈틈없는 서사가 아니라 틈을 통해 숨 쉬는 서사에서 나온다.

그 틈이 독자를 세계와 ‘다시’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심사가 끝날 때마다 재확인하게 되는 원칙이다. 올해 세계문학상 본심에 오른 작품은 모두 여섯 편이다.

중견 소설가 은희경 심사위원장(가운데)을 비롯한 세계문학상 심사위원들이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제22회 세계문학상 본심 심사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심사위원인 소설가 하성란·전성태, 평론가 정홍수, 은 위원장, 소설가 김유진, 평론가 박혜진, 소설가 강영숙. 이재문 기자

보험 분쟁을 소재로 한 ‘모노레일’은 사건 전개가 명확하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기술 또한 능란한 작품이었으나 보험금, 자살 판정 등 보험 분쟁이라는 소재에 뒤따르는 테마들이 익숙한 질문과 감각을 반복하며 스스로 정체되는 양상을 보였다. 주인공의 트라우마 또한 갈등의 질을 높이기보다 감정적 당위를 부여하는 기능에 머무른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M’은 생동감 있는 목소리가 돋보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재편되는 가족의 감정 구조나 엄마의 연인 M을 마주하는 딸의 시선은 스물한 살 여성의 도발적인 성인식을 담아낸다. 그러나 M의 존재 및 그의 정체를 깨닫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녀의 욕망과 탈출이 과도하게 상징화되며 의미와 선언이 앞선 형국이 되었다.

‘호루라기를 부는 소녀’는 작가 스스로 재미있게 썼다는 것이 읽는 사람에게까지 전해지는 작품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전개, 갈등과 장면 전환을 다루는 감각에서 자신이 쓰는 서사에 대한 확신이 감지됐다. 그러나 통속적인 흥미를 넘어서지 못하는 속도와 활력은 공허함을 동반한다. 관계가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 변화가 어떤 질문으로 확장되는지 탐색되었다면 한층 여운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발열’은 과감한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1991년 학생운동의 분신 정국을 소환하는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과거의 선택과 책임을 다시 묻고자 한다. 그러나 사안과 시대에 대한 리얼리티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데에서 오는 소설 내적, 외적 의문들과 더불어, 1991년이라는 역사적 시기를 어떤 거리와 윤리로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유보된 채 끝나면서 질문의 밀도에 비해 소설적 태도가 충분히 정립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본심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허용 오차 범위’와 ‘유리 조각 시간’이다.

‘허용 오차 범위’는 잔여 수명을 예측하는 인공지능 ‘몽사’를 통해 수명을 안다는 것이 삶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를 사유하는 작품이다. ‘사망 적중률’과 ‘생존 오류’가 만들어내는 윤리적·존재론적 긴장은 기술과 자본이 인간의 시간을 관리 대상으로 만드는 동시대적 문제를 설득력 있게 호출한다.

그러나 주제의식과 치밀한 설정이 오히려 작위성을 강화해 인물의 감정과 선택 또한 설정을 증명하는 기능으로 축소되며 서사적 생동감이 희석되었다. 정교하게 맞춰진 구조가 이야기의 숨을 조인 부분은 없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유리 조각 시간’은 학창 시절 우정을 나눈 유영과 경진이 성인이 되어 다시 마주하며 소설을 매개로 자신의 과거와 상처를 재독하는 과정을 그린다.

채팅 사이트에서 시작된 두 인물의 관계를 통해 청소년기의 불안과 결핍, 연약한 연대를 섬세하게 포착하며 기억과 관계가 어떻게 다시 서사화되는지를 차분히 밀어붙이는 이 작품은, 평범한 장면을 매혹적으로 만들어내는 디테일의 힘과 소설 읽는 행위 자체를 서사의 중심 장치로 삼은 구조가 특히 인상적이다. 드물게 자기 목소리를 지닌 작품으로, 개인의 기억을 넘어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까지 자연스럽게 확장해 나가는 힘을 보여 준다.

빈틈없이 닫힌 의미가 아니라 인물과 독자가 함께 머물 수 있는 틈을 남김으로써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드는 이 소설을 올해의 세계문학상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공감과 위로, 치유와 회복이라는 문학의 오래된 역할을 경신하는 작품이 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은희경·강영숙·김유진·박혜진·전성태·정홍수·하성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