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는 한 줄의 평가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인물들이 있다. 고구려 유민으로 태어나, 당나라 현종의 명을 받아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 원정에 나섰던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고구려 부흥의 꿈을 품고 싸운 영웅으로 소설 속에 그려지기도 했고(유현종, ‘천산북로’), 중국의 종이와 문명이 유럽 세계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든 ‘실크로드의 제왕’으로 조명되기도 했다(KBS 역사스페셜).
고선지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유럽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영국의 탐험가 아우렐 스타인 경은 그의 전적지를 직접 답사한 뒤, 고선지가 불과 1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산지대 수천 리를 행군해 당시 서역의 패권국이던 토번의 대군을 기습·제압한 사실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를 두고 “알프스산맥을 넘은 한니발보다도 뛰어난 원정”이라 극찬했다. 그러나 이러한 후대의 평가와 달리, 당대의 대우는 형편없었다. 그의 상관은 그를 ‘개똥 같은 고구려 놈’이라 모욕했다. 도대체 고선지는 누구였으며, 그는 어떻게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無攻不克]’ 장군이 될 수 있었을까.
중국의 역사서 ‘구당서’에 따르면, 고선지는 본래 고구려 사람으로 아버지를 따라 오늘날 중국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 일대에 해당하는 안서(安西)지역에서 종군하며 전공을 쌓았고, 스무 살에 이미 유격대장이 되었다. 안서절도사 부몽영찰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여러 차례 발탁해 안서부도호에 이르게 했다. 한편 ‘고선지 평전’을 쓴 지배선 교수는, 패망한 고구려 유민들이 고비사막 서쪽으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고선지의 가족 역시 그중 하나였다고 본다. 어린 시절의 고선지는 ‘날래고 용감하며, 말 위에서 활 쏘는 실력이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처럼 놀라운 전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세종 때 편찬된 ‘치평요람’은 고선지의 승전 요인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적소적재의 인재 운용이다. 750년, 천험의 요새 연운보를 공격할 때 그는 낭장 이사업을 선봉으로 삼아 야음을 틈타 강을 건너 기습하게 했고, 그 결과 적 1만여명 가운데 절반 이상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보다 앞서 톈산산맥 서쪽의 달해부 정벌전에서도 한족 출신 봉상청을 과감히 기용해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는 출신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사람을 쓰는 그의 용인술을 잘 보여준다.
둘째는 주도면밀한 전략·전술의 구사 능력이다. 고선지는 장기간 행군 뒤 병력을 재정비한 후, 예상을 깨고 군대를 나누어 산악지대에 맞게 게릴라식 전투 대형으로 동시 공격을 감행했다. 수량 변화를 치밀하게 계산해 도강 시점을 정하고, 이를 ‘하늘의 뜻’으로 설명해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정보 분석과 심리전이 결합된 전쟁 방식이었다.
셋째이자 가장 중요한 요인은 솔선수범과 소통을 통한 비전 공감이었다. 험준한 산악지대를 따라 3000리를 강행군하는 길에서 그는 늘 앞장섰고, 전리품을 병사들과 고루 나누었다. 자신을 시기하고 비난하는 부하들에 대해서도 잘못은 짚되 모욕하거나 과도하게 처벌하지 않았다. 그 결과 “군대 안에 심리적인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고선지는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장군이었다. 전략·전술, 인재 운용,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 리더십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양귀비와 안녹산의 난으로 상징되는 정치적 혼미 속에서 당나라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치평요람’ 편찬자들의 표현처럼 “배가 이미 가라앉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고선지는 끝내 반란군에 동조했다는 모함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대한민국의 배는 과연 어디쯤 와 있는가.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