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후 2시 충북 청주시 청주공항 내 ㈜알에이치포커스(RHF) 유지보수(MRO) 센터. RHF는 국토교통부 승인 항공기 정비업체로 지난 30년간 산림청, 해경 등 정부기관과 민간이 운항·관리 중인 헬리콥터(약 60여대)의 조립 및 A/S 지원을 통해 차별화된 기술력과 전문성을 쌓아온 곳이다. 산불 진화 헬기의 대명사인 러시아산 카모프 헬기(KA-32) 역시 대부분 이곳을 통해 정비가 이뤄져 왔다. 하지만 이날 헬기 12대의 동시 정비 가능한 3400평 규모 MRO 센터 내부에는 고작 헬기 몇 대만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RHF 김경호 상무는 “며칠 전까지도 센터를 가득 채웠던 산림청 소속 카모프 헬기들이 산불 위험이 커지면서 서둘러 정비를 마치고 산림항공본부로 귀환해 전국에서 대기 중”이라고 전했다. 올해도 산불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덩달아 대형 산불의 위험 또한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대형 산불 진화 헬기 ‘치누크’ 등장
산림청은 지난달 25일 국내 최초 민수용 대형헬기 ‘치누크’(CH-47) 1대를 신규 도입했다고 밝혔다. 이 헬기는 군용헬기를 산불 진화 헬기로 개조한 미국산 기종이다. 최대 1만ℓ의 물을 싣고, 시속 259㎞로 비행할 수 있다고 한다. 산불이 대형화하며 기존 다수의 헬기를 띄우는 방식에서 초기 단계에 압도적 화력을 투입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다. 산불 진화의 ‘골든타임’을 확보할 것이란 기대감을 높인다. 산림청은 치누크는 야간에도 산불 진화에 나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치누크는 최근 경주시 문무대왕면 입천리에서 발생한 산불 현장에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산불 진화율이 높아지는 상황 등을 고려했다지만 정작 산불 피해주민들에겐 아쉬움을 남겼다.
현재 산림청이 보유하고 있는 산불 진화 헬기는 총 49대로 집계됐다. 전체 70% 정도가 도입된 지 20∼30년 정도 된 구형 기체로, 산불 진화가 가능한 헬기는 전체 49대 중 39대에 불과하다. 산림청 통계를 보면 2022년 산불 진화에 1234대의 헬기가 투입됐으나 2023년 855대, 2024년 289대로 헬기 가동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반복되는 사고와 정비 인력 부족, 조종사 고령화·피로 누적 등 구조적 한계에 노출된 탓이다.
◆주력인 카모프 헬기 추가 도입 가능성은
초대형급인 치누크 헬기의 담수 용량은 중형헬기인 카모프에 비해 월등하다. 반면 기체가 크고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게 조종사들의 심적 부담감을 키우는 요소다. 더구나 대형헬기는 비행 15시간마다 정비를 해야 한다. 하루 진화에 나서면 다음 날은 쉬어야 해 전천후로는 사용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반면 카모프는 주회전날개가 동축반전으로 이뤄져 꼬리날개가 없다 보니 담수 및 비행 시 안정감이 높다. 여기에 동체도 짧아 산악지형이나 협곡 등에서의 비행에 적합하고 기동성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대러시아 경제제재 조치로 신형 헬기 수입은커녕, 기존 카모프에 대한 후속 정비 지원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부품 공급이 제때 안 돼 다른 헬기를 뜯어 전용해 사용한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다. 카모프 헬기는 최근 10년 동안 국내에 한 대도 도입되지 않았다. 공백이 현실화할 우려가 작지 않다. 강풍이 동반되는 봄철 산불에 카모프 헬기 효용성은 이미 입증된 상태다. 지난달 15일, 모스크바 크레믈에서 열린 주러시아 대사 신임장 제정식 연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과의 관계 회복을 기대한다고 직접 언급했다. 정부가 노태우정부 시절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한 경협 차관의 일부를 돌려받지 못한 상태이고 보면, 이를 카모프 헬기로 돌려받는 방안도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다. 마침 새 정부 들어 러시아와의 수산물 협상에 진척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하루빨리 전쟁의 포연이 멎고 양국 간 협상 물꼬가 트여 산불 재난 예방에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진화 헬기 전문가 신원주 자문위원 “올해 국토 더 바싹 말라… 대형 화마 우려 높아”
신원주(사진) RHF 자문위원은 산림청 산림항공본부에서 오랫동안 안전과 정비 업무를 담당한 산불 진화 헬기 전문가다. 산불 방지 유공 대통령 표창 및 녹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2017년 삼척 산불 때다. 당시 진화를 위해 물을 싣고 가던 카모프 헬기 한 대가 송전선에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송전선을 뚫고 가까스로 비상 착륙한 헬기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됐다. 더 놀라운 일은 이런 비상 상황을 겪고도 사고 헬기가 다시금 산불 진화 현장에 투입됐다는 사실이다. 신 위원은 당시 기체 복원 작업을 통해 사고 헬기를 정상화한 뒤 산불 현장에 투입했던 주인공이다.
―지난 1월에 이례적으로 ‘경계’ 단계 산불재난 경보가 발령됐는데.
“우리나라는 매년 봄이면 ‘남고북저’(南高北低)의 기압배치 속 기온이 높고 건조한 서풍이 거세게 불면서 산불이 발생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다. 올해는 더 바싹 말라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올해도 대형 산불의 화마가 덮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산불은 초동 진화가 중요하다고 들었다.
“통상 산불 신고를 받고 출동한 헬기가 이륙한 뒤 물을 싣고서 물을 뿌릴 때까지 30분을 골든타임으로 본다. 따라서 산불 발생이 빈번한 곳은 초동 진화를 위한 헬기가 현장에 배치돼 있어야 한다. 산불재난 경보가 경계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진화 헬기를 이미 전국에 기동 배치했다는 의미다.”
―산림청이 보유한 진화 헬기는 적정한가.
“강원도 원주 산림항공본부를 비롯, 전국 각 관리소마다 카모프 헬기를 2대 이상 배치해 관할구역 내 발생한 산불 초동 진화에 대비한다. 산림청에다 민간 임차 헬기까지 포함하면 전국에서 대략 300여대 정도의 헬기를 동원할 수 있다. 이마저도 동시다발로 대형 산불이 발생하면 모자란다.”
―왜 그런가.
“대부분 헬기는 보통 50시간 정도 비행한 뒤에는 반드시 정비를 받아야 한다. 기존 헬기가 정비를 위해 빠지면 진화하던 구역에 다른 헬기가 투입되는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 헬기 300여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모두 현장에 동시 투입하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이러다 보니 산림 당국은 많은 수의 헬기 투입보다 산불 상황에 맞는 적절한 헬기 투입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과거 산림청에서 산불 진화를 위한 고정익 항공기 도입도 검토했다는데.
“몇 년 전에 미국 보잉사의 747 화물기를 개조해 산불 진화용으로 운용 중인 에버그린 슈퍼탱커의 임차와 진화 방식을 도입하려 했던 적이 있다. 비용이 만만치 않고 우리 산악지형에는 적합하지 않아 검토만 했던 것으로 안다.”
―인공지능(AI)과 드론 기술의 발달로 효율적인 진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동의하나.
“산불은 바람 등 기상 상황에 따라 수시로 진행 방향이 변화한다. AI가 입력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실시간 변화하는 현장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판단이 가장 중요하다. AI와 드론을 활용한 진화에는 한계가 있다.”
―실화자에 대한 처벌이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처벌이 능사는 아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도입됐다고 해서 안전사고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 국민 개개인이 작은 부주의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한다는 경각심을 갖도록 예방교육이 우선돼야 한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의식도 중요하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