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상담요? 요즘은 그런 거 묻는 분 별로 없어요. 대신 종목 게시판이나 증권사 앱 켜서 수익률 보여주며 ‘이거 정리하면 서초동 들어올 수 있냐’고 묻는 분들이 줄을 섰죠.”
14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공인중개사무소. 전화기는 연신 울려댔지만, 예전처럼 대출 한도를 묻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모니터 너머 붉게 물든 코스피 그래프와 강남 아파트 매물을 번갈아 보는 자산가들의 은밀한 방문이 이어졌다. 은행 문턱이 높아지자 돈의 물길이 스스로 바뀐 것이다. 증시에서 달궈진 뭉칫돈이 향한 종착지는 결국 ‘강남’이라는 이름의 콘크리트 요새였다.
◆대출 규제가 만든 ‘자산 대이동’
국토교통부가 국회에 제출한 서울 주택 매수 자금조달계획서 집계에 따르면, 2025년 서울 주택 매수에 활용된 주식·채권 매각 대금은 3조8916억원으로 2022년(5765억원) 대비 급증했다.
돈의 이동은 규제와 정확히 맞물려 움직였다. 수도권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옥죈 6·27 대책 시행 직후인 지난해 7월부터 12월까지 반년 동안에만 2조948억원이 쏟아졌다.
코스피가 4000선을 돌파하며 고점을 찍은 직후, 고가 주택 대출을 추가로 막은 10·15 대책이 겹친 10월 한 달에만 5760억원이 집중됐다.
한국은행 ‘가계신용(잠정)’ 통계에서도 2024년 들어 주담대 증가폭은 확연히 꺾였다. 은행 창구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워지자, 자산가들이 지체 없이 주식 계좌를 열어 유가증권을 현금화했다는 것을 뜻한다.
◆강남 3구로 직행한 9098억원
6·27 대책 시행 직후인 2025년 7월부터 2026년 1월까지 7개월 동안엔 2조3966억원이 유입됐다. 이 중 37.9%(9098억원)이 강남·서초·송파(강남 3구)로 향했다.
강남 3구의 평균 매매가격은 서울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다. 대출 없이도 수십억원을 동원할 수 있는 현금 부자들이 증시 고점에서 차익 실현을 한 뒤, 가장 안전한 자산인 ‘강남 아파트’로 갈아탄 셈이다.
한 시중은행 PB 창구 직원은 “대출 규제 이후 오히려 수익을 확정한 자산가들이 강남권 똘똘한 한 채로 자산을 파킹하는 흐름이 뚜렷해졌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촘촘해진 검증, 내 자산의 현주소는?
정부도 자금 줄기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부동산거래신고법 시행령 개정으로 자금조달계획서 검증은 한층 매서워졌다. 이제 가상화폐 매각 대금은 물론, 해외 예금이나 대출 등 해외 자금 조달 내역까지 샅샅이 적어 내야 한다.
단순히 주식을 팔아 집을 샀다는 일시적 유행이 아니다. 대출 규제가 낳은 주담대 둔화, 증시 차익 실현, 강남 고가 주택 집중 매수라는 거대한 ‘자산 이동 사이클’이 완성됐음을 뜻한다.
은행 돈줄이 마르면 시장은 기어코 다른 길을 뚫어낸다. 주식 계좌를 빠져나와 강남으로 향한 3조8916억원의 ‘증시 머니’가 그 증거다. 다음 자산 시장의 향방을 결정지을 거대한 자금 이동은 이미 시작됐다.
굳게 닫힌 은행 대출 창구 앞, 발길을 돌리는 무주택자의 짙은 한숨 뒤로 수조원의 뭉칫돈은 오늘도 강남의 견고한 아파트 숲을 향해 조용히 흘러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