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는 전쟁과 분단, 냉전과 재건이라는 거대한 격랑의 연속이었다. 그 풍랑 한복판에서 종교적 신념을 동력 삼아 국가의 운명을 지탱했던 두 인물이 있다. 바로 한상국과 박보희다. 두 사람은 통일교 신앙을 가진 종교인이었지만, 동시에 군인의 신분으로 국가를 대표했고 훗날 민간 외교의 무대에서 한국의 얼굴이 되었다. 이들의 삶은 종교적 신념과 국가적 사명이 만나는 ‘정교협력(政敎協力)’의 한 모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61년 11월 미국 백악관 오벌 오피스. 케네디 대통령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마주 앉았다. 박 의장은 그해 5월 16일 육군 소장 신분으로 정권을 장악했으나, 당시 미국은 공식적으로 군사 쿠데타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한미 관계의 향방이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그때, 두 정상 사이에서 언어의 가교를 놓았던 인물이 바로 한상국 중령이었다. AP 통신은 그를 “Lt. Col. Sanguk Han, Korean interpreter”라고 기록했지만, 그는 통역관 그 이상의 존재였다. 박 의장을 수행하던 그에게 언어의 선택과 조율은 곧 국익의 수호였다. 한 문장의 뉘앙스가 동맹의 온도와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자리에서 그는 군인의 투철한 책임감과 신앙인의 정직한 양심을 양 날개 삼아 외교의 최전선을 지켜냈다. 이 회담을 기점으로 미국은 박정희 정부를 사실상 인정하게 되었고, 이는 한국 재건을 위한 군사·경제 원조의 지속으로 이어졌다.
그 회담에는 훗날 제36대 대통령이 되는 린든 B. 존슨 부통령도 배석해 있었다. 냉전의 중심부에서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던 한상국은 이후 노르웨이 대사, 워싱턴타임스 사장, 세계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행보는 군복에서 외교관으로, 다시 언론인으로 직함만 바뀌었을 뿐, 일관되게 국가와 시대의 전면에서 국익을 지키고 동맹의 가치를 설파하는 헌신으로 향해 있었다.
박보희의 길 또한 한국전쟁의 포화와 깊이 맞닿아 있다. 1952년 미국 대선 과정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I shall go to Korea”라는 한 문장을 남겼다. 전쟁을 조속히 끝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당선 직후 그는 실제로 총성이 멎지 않은 한국 전선을 찾았다. 전황을 직접 살피고 유엔군 지휘관들을 만났던 그의 행보는 곧 정책으로 이어졌다. 1953년 취임한 그는 그해 7월 휴전협정을 이끌어냈고, 이어 10월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안보 동맹의 기틀을 확립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인 1965년 박보희는 한국의 어린이들을 대동하고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한국을 지켰던 노병 아이젠하워 앞에 섰다. 게티즈버그 자택에서 열린 리틀엔젤스의 공연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피어난 아이들이 자유세계의 상징적 지도자 앞에서 춤추는 장면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한 감동이었다. 그것은 전쟁의 기억을 치유하고 감사와 우정의 메시지를 전하는 민간외교의 극치였다. 견고한 외교적 토대 위에서 ‘문화’라는 새로운 통로를 개척한 것은 혜안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육군 중령 출신으로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을 지낸 박보희는 이후에도 리틀엔젤스를 이끌고 닉슨 대통령 재임 중 백악관 무대에 올랐으며, 1971년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앞에서의 어전 공연을 성사시켰다. 그는 한국의 전통예술로 총과 조약이 만든 군사동맹 위에 문화의 다리를 더하며 세계인의 마음을 두드렸다. 하드파워가 만든 토대 위에 소프트파워의 꽃을 피워 올린 셈이다.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역사 속 정교협력은 이처럼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 진가를 발휘해 왔다. 백악관의 통역석에서, 게티즈버그의 공연장에서 그들은 양심과 사명을 다해 공적 책임을 완수했다. 당시 한 교단에 몸담았던 한상국은 외교의 ‘입’으로, 박보희는 문화의 ‘선봉’으로 각자의 소명을 다했다. 두 사람은 군인의 엄격함과 종교인의 소명을 동시에 품고 냉전의 전선과 세계의 무대를 누볐다. 신앙이 내면을 단단하게 지탱하고, 그 힘이 국가를 위한 지혜와 용기로 발현된 결과였다. 오늘날 정교분리의 원칙은 확고하며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그러나 이것이 공적 영역에서 신앙적 가치가 완전히 배제되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제도는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국가를 움직이는 실체는 결국 신념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념과 사명을 다한 이들의 헌신은 역사 속에서 조용히 한 나라의 운명을 밝혀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