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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伊 사법개혁안 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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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검찰은 행정부(법무부)가 아닌 사법부(법원) 소속이다. 과거 파시스트 정권의 시녀로 악명이 높았던 검찰은 1946년 공화국 출범과 함께 법무장관의 지휘권이 폐지된 덕분에 정치권력에서 독립할 수 있었다. 1992년 젊은 검사들이 주축이 돼서 전개한 부패추방운동 ‘마니풀리테’(깨끗한 손)가 성공을 거둔 배경이다. 당시 수사 대상 6000여명 중 국회의원이 440명이나 됐다. 유력 정당 4개의 당수가 사임 후 부패 혐의로 수사를 받았고, 전직 총리 4명이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됐다. 구속된 정·재계 고위인사는 3000명에 육박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검사와 판사가 동일체다. 모두 ‘법관’으로 부르며 인사 교류도 자유롭다. 이들 중 ‘치안판사’가 우리나라의 검사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순수하게 기능상 분리에 그친다. 모든 법관의 임명·전보·승진 등 인사는 최고사법위원회가 담당한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야심 차게 추진한 사법개혁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23일(현지시간) 부결됐다. 사법개혁안의 골자는 판사와 검사의 역할을 분리하고 최고사법위를 개편하는 내용이다. 2022년 극우 연립정권을 이끌고 집권한 멜로니 총리는 지금까지 승승장구했으나, 내년 총선을 앞두고 실시된 이번 국민투표 부결로 정치적 타격을 받았다.

‘사법 개혁’은 지난 30년간 이탈리아 보수진영의 화두였다. 사법부 권한이 과도해 정부 정책의 걸림돌이 된다고 비판해 왔다. 보수는 사법부가 강경 난민정책에 제동을 걸 때마다 ‘권한 남용’이라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멜로니가 국민투표를 앞두고 줄곧 “반대표가 승리할 경우 성폭행범과 아동 성추행범들이 석방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도 난민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국민은 ‘반대 54%, 찬성 46%’(개표율 90% 기준)로 멜로니 대신 야당과 법조계, 시민단체의 손을 들어줬다. 야당 등은 정부가 사법개혁을 통해 검사를 통제하게 되면 수사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고 재판 지연이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 ‘검찰·사법개혁’도 사법부 독립을 침해하고 정권의 수사 개입 우려가 높았지만 여권은 야당과 법조계,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밀어붙였다. 장차 시행 과정에서 부작용이 커지면 ‘개혁’을 다시 개혁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