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54년 ‘솔로 침묵’ 깬 ‘무적’ 심권호…간암 극복 끝에 털어놓은 뭉클한 꿈

입력 :
폰트 크게 폰트 작게
강제로 지워진 체급을 근육으로 버텼던 승부사, 간암과 고독사 공포 뚫고 찾아낸 ‘생의 라운드’

세상은 그를 ‘무적’이라 불렀다. 하지만 매트 위에서 단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던 승부사에게 예고 없이 들어온 삶의 태클은 가혹했다. 올림픽 2체급 석권과 통산 204연승의 기록을 남긴 심권호가 마주한 것은 화려한 은퇴가 아닌 ‘초기 간암’ 판정과 반백 년 넘게 이어진 정적이었다. 세계를 제패했던 강인한 육체도 술과 고립 앞에서는 무력하게 침전했다. “그냥 사라지고 싶었다”던 작은 거인은 최근 달라진 혈색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54년 세월을 ‘모태솔로’로 살아온 그는 투병 끝에 생애 첫 소개팅에 나섰고, 그간 베일에 싸여있던 ‘연금 수령액 1위’의 실체와 전재산을 공개하며 인생 2막의 서막을 열었다.

금메달 뒤에 숨겨졌던 반평생의 침묵이 깨지는 순간, 투사(鬪士)의 얼굴에 낯선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연합뉴스·TV조선 ‘조선의 사랑꾼’ 화면 캡처
금메달 뒤에 숨겨졌던 반평생의 침묵이 깨지는 순간, 투사(鬪士)의 얼굴에 낯선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연합뉴스·TV조선 ‘조선의 사랑꾼’ 화면 캡처

 

심권호는 최근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초기 간암 진단과 수술 과정을 가감 없이 공개했다. “혼자 있으면 외로움이 확 몰려와 술을 마셨다”는 그의 고백은, 무대 중앙에서 내려온 챔피언이 마주한 고단한 현실이자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당하는 속수무책의 패배였다. 간 수치가 정상 범위를 크게 벗어난 상태에서 CT 촬영조차 거부할 만큼 심리적 위기도 겪었다. 하지만 주변의 응원 속에 무사히 수술을 마쳤고 현재는 조기축구에 참여할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레슬링 역사상 유례없는 48연승 무패 신화를 썼던 그 근성은 병마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악바리 같은 투혼으로 부활했다. 특히 그는 세계 레슬링 사상 최초로 두 체급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며 확보한 연금 점수 덕분에 체육인 복지 연금이 도입된 이래 매달 상한액을 수령하는 ‘수령액 1위’의 상징적 지위를 수십 년째 유지하고 있다.

 

그의 삶을 지탱하는 또 다른 실체는 철저한 자기 관리와 성실함으로 일궈온 막대한 자산 규모다. 1996년 애틀랜타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로 확보한 연금 점수는 이미 상한선을 초과한 지 오래이며, 지금까지 수령한 연금 누적액만 10억원 이상으로 확인된다. 여기에 ‘LH(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부장직으로 20년 넘게 근속하며 쌓아온 연봉과 저축액 또한 상당한 수준이다. 운동선수 출신이 공기업에서 정년 가까이 근속하며 ‘부장’ 타이틀을 단 것은 그가 매일 새벽 5시 태릉의 공기를 마시며 단련했던 루틴이 사회에서도 유효했음을 증명한다.

태릉의 새벽 공기로 버틴 30년, 그 성실함이 남긴 실체적 증거는 연금과 자산 그 이상이었다. 채널A ‘불멸의 국가대표2’ 화면 캡처·라이트하우스셀프 제공
태릉의 새벽 공기로 버틴 30년, 그 성실함이 남긴 실체적 증거는 연금과 자산 그 이상이었다. 채널A ‘불멸의 국가대표2’ 화면 캡처·라이트하우스셀프 제공

 

특히 이번에 공개된 ‘숨은 땅부자’로서의 면모는 대중을 놀라게 했다.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광주 등지에 마련해둔 토지 자산은 단순한 재력을 넘어 사회인으로서의 노후를 지탱하는 울타리가 되었다. 술과 유흥 대신 땅을 사고 저축을 택했던 그의 선택은 고독의 시간을 견뎌낸 보상과도 같다. 한평생을 자신과 싸우느라 곁을 내어줄 틈이 없었던 그는 숙명처럼 그 단단한 인내의 결실을 함께 나눌 실제 주인을 조우했다.

 

지난 4월20일 TV조선 예능 ‘조선의 사랑꾼’에서 공개된 심권호의 소개팅 현장은 서툴지만 진실했다. 54세 ‘모태솔로’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그는 홍삼을 들고 찾아온 여성 팬과의 만남에서 평생 마주해온 그 어떤 상대보다 낯선 긴장감을 투명하게 드러냈다. “전 재산을 미래의 아내에게 맡기겠다”는 그의 파격 선언은 더 이상 허공을 맴도는 약속이 아닌 눈앞의 상대를 향한 정중한 제안이었다. 이는 재력 과시가 아니라, 치열한 길을 걸어온 전사가 비로소 자신의 모든 성취를 믿고 맡길 단 한 사람의 온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심권호의 현재는 성공한 인물의 박제된 기록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울림을 준다. 사라진 체급에 맞춰 몸을 다시 설계했던 20여 년 전의 기개는 당당히 질병과 적막이라는 생애 주기적 과제를 정면 돌파하는 에너지로 바뀌었다. 전 재산을 아내에게 주겠다는 그의 투박한 진심은, 결국 인간을 살게 하는 힘은 메달의 무게가 아니라 사람의 온기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증명한다. 그는 자신의 약점과 병명을 숨기지 않았으며 늦깎이 연애를 시작하는 서툰 모습조차 담백하게 노출했다. 정점에 올랐던 인간이 바닥을 치고 다시 일어설 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철학이 아닌 곁을 내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소박한 욕망과 ‘살고자 하는 성실함’뿐임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다.

평생의 성취를 믿고 맡기겠다는 서툰 고백, 전사의 손은 금메달을 쥘 때보다 더 세밀하게 떨리고 있었다. TV조선 ‘조선의 사랑꾼’ 화면 캡처
평생의 성취를 믿고 맡기겠다는 서툰 고백, 전사의 손은 금메달을 쥘 때보다 더 세밀하게 떨리고 있었다. TV조선 ‘조선의 사랑꾼’ 화면 캡처

 

과거 세계 연맹이 그의 독보적인 기술을 견제하기 위해 종목의 규칙을 바꾸고 체급을 없앴을 때도 그는 불평 대신 새로운 체급에 자신의 근육을 맞췄다. 그 강철 같은 승부 근성은 마침내 간암이라는 질병과 고독이라는 사회적 형벌 앞에서도 동일하게 발휘된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와 다시 축구화를 신고 데이트 상대를 위해 꽃을 고르는 그의 행보는 기록보다 강렬한 삶의 흔적이 된다. 54년 만에 마주한 이 서툰 첫사랑의 시작은 사선을 넘나들던 작은 거인이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 내딛은 첫 번째 발자국이다. 자신을 깎아 메달을 빚었던 주인공은 오랜 기다림 끝에 누군가와 함께 걸을 준비를 마쳤다. 그의 진짜 인생은 어쩌면 이제, 첫 번째 라운드의 공이 울렸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