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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 속이는 시대… 무엇을 믿어야 하나

뻐꾸기 탁란·죽은 척하는 주머니쥐
생존·번식 위한 교묘한 진화적 수법
인간도 돈·정보 편취 기만행위 난무
정직은 속임수 억제하는 안정 전략
예리한 관찰로 경계·신뢰 기준 제시

자연에서 인간까지 속임수의 진화/ 리싱 선/ 김아림 옮김/ 세종서적/ 2만2000원

 

저자는 인간 사회에서 속임수는 도덕적 일탈로, 정직은 명예로운 가치로 여겨지지만 생물의 세계에서 속임수는 흔하게 발견되는 보편적인 생존 전략이라고 말한다. 세종서적 제공
저자는 인간 사회에서 속임수는 도덕적 일탈로, 정직은 명예로운 가치로 여겨지지만 생물의 세계에서 속임수는 흔하게 발견되는 보편적인 생존 전략이라고 말한다. 세종서적 제공

한 여성이 몰래 남의 집에 들어가 갓 태어난 아기를 바꿔치기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 그 집에 있던 아기를 버린다. 집주인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다른 아이를 키운다. 이 이야기는 마치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범죄 기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대자연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범인은 다름 아닌 뻐꾸기다.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맡기고 양육을 떠넘기는 이 기만은 뻐꾸기의 일상적인 생존 전략이다. 어떤 난초는 암컷 곤충의 냄새와 몸짓까지 정교하게 흉내 내 수컷을 유혹한다. 짝짓기를 시도한 수컷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꽃가루를 옮기는 매개체가 된다. 송로버섯은 멧돼지의 페로몬과 유사한 냄새를 풍겨 동물을 유인하고, 땅을 파헤치게 만들어 번식을 돕는다.

남의 자식인 줄 모르고 자신보다 몸집이 훨씬 큰 뻐꾸기 새끼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개개비. 세종서적 제공
남의 자식인 줄 모르고 자신보다 몸집이 훨씬 큰 뻐꾸기 새끼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개개비. 세종서적 제공
포식자로부터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독사의 머리를 모방한 속임수로 생존 전략을 펼치는 박각시나방 애벌레. 세종서적 제공
포식자로부터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독사의 머리를 모방한 속임수로 생존 전략을 펼치는 박각시나방 애벌레. 세종서적 제공

동물행동학자이자 진화심리학자인 리싱 선 센트럴워싱턴대 석좌교수는 ‘자연에서 인간까지 속임수의 진화’에서 자연계가 얼마나 정교한 기만으로 가득한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자연의 ‘사기꾼’은 뻐꾸기나 난초, 송로버섯에만 그치지 않는다. 교미를 위해 상대에게 몰래 접근하는 원숭이, 포식자를 속이기 위해 죽은 척하는 주머니쥐, 경쟁자를 쫓아내기 위해 거짓 경보음을 내는 조류, 독을 지닌 종을 흉내 내는 무독성 나비 등 다양한 사례가 제시된다.

속임수는 더 단순한 생명체에서도 발견된다. 박테리아 사회에는 협력하지 않고 이익만 챙기는 ‘무임승차자’가 존재한다. 나아가 세포와 유전자 수준에서도 서로를 속이며 생존 확률을 높이려는 경쟁이 벌어진다. 특정 유전자는 경쟁 유전자를 억제하거나 제거해 자신이 더 많이 전달되도록 작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연계의 속임수는 동물과 식물은 물론 균류, 박테리아, 바이러스, 염색체, 유전자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적 세계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리싱 선/ 김아림 옮김/ 세종서적/ 2만2000원
리싱 선/ 김아림 옮김/ 세종서적/ 2만2000원

이러한 사실은 자연이 우리가 믿어온 ‘정직하고 조화로운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보여준다. 오히려 자연은 속임수와 기만, 전략이 끊임없이 맞물리는 거대한 생존 게임에 가깝다. 각 생물이 이처럼 교묘한 속임수를 구사하는 이유는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한 진화적 전략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진화는 윤리적 선호나 명예로운 규범에 관심이 없으며, 오직 실용적으로 작동하는 비도덕적 과정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협력과 기만 역시 구분 없이 생존과 번식에 기여하는 방식이라면 선택될 뿐이라는 것이다.

자연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원리는 인간 사회에서도 반복된다. 다만 그 대상이 먹이와 번식에서 돈과 정보로 바뀌었을 뿐이다.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실제 주인공인 프랭크 애버그네일은 조종사, 의사, 변호사로 신분을 바꿔가며 거액을 편취했다. 또 가상화폐 사기로 세계를 뒤흔든 루자 이그나토바 사건 역시 화려한 언어와 권위를 앞세운 기만이 얼마나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 역시 끊임없이 속고, 동시에 속임수를 경계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자연에서 모든 신호가 거짓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고도, 유혹도, 협력도 더 이상 신뢰받지 못하게 된다. 결국 사회적 상호작용 자체가 붕괴하고 협력은 불가능해진다. 즉, 거짓이 극단으로 치닫는 순간 시스템은 유지될 수 없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정직한 신호’다. 쉽게 위조할 수 없거나, 거짓으로 흉내 내기에는 지나치게 비용이 큰 신호들이다. 이러한 신호는 역설적으로 정직이 더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낸다.

속임수가 진화하면 이를 탐지하는 능력이 진화하고, 다시 더 정교한 속임수가 등장하는 ‘군비 경쟁’ 속에서 특정 조건에서는 정직이 가장 안정적인 전략으로 선택된다.

법과 제도, 언론, 과학적 검증 시스템 역시 이러한 속임수를 억제하고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우리가 정직을 미덕으로 강조하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다. 정직이 없으면 사회 자체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와 피싱, 정보 조작이 일상화된 시대에 우리는 더 이상 ‘속지 않는 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속임수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왜 반복되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이 책은 그 작동 원리를 근본적인 수준에서 풀어낸다.

자연에서 시작된 기만이 인간 사회로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을 신뢰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한층 분명해진다. 저자는 ‘왜 우리는 속는가’라는 질문을 자연 전체의 역사로 확장하며, 동시에 왜 정직과 신뢰가 여전히 중요한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기적 유전자’ 이후 진화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제안하는 지적 탐험서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