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값은 빠듯한데, 주식은 못 팔겠더라.”
생활비 통장을 보면 여유가 없다. 월급날은 멀고, 카드 결제일은 먼저 온다. 그래도 해외주식 계좌만큼은 쉽게 건드리지 않는다. 요즘 40·50대 투자자 사이에서 낯설지 않은 흐름이다. 숫자도 이를 보여준다.
29일 한국예탁결제원 증권정보포털에 따르면 국내 투자자의 미국 주식 보관액은 지난 1월 16일 1718억달러까지 불어났다. 2022년 말 442억달러, 2023년 말 680억달러, 2024년 말 1121억달러를 거쳐 단기간에 몸집을 키웠다.
물론 계속 오른 것만은 아니다. 3월 미국 주식 보관금액은 1542억달러로 줄었고, 순매수 규모도 1월 약 50억달러에서 3월 16억9000만달러로 낮아졌다. 그래도 흐름은 분명하다. 일부 조정이 있었지만, 미국 주식 계좌가 이미 가계 자산 안에서 쉽게 비우기 어려운 돈이 됐다는 점이다.
한국은행 분석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개인투자자의 해외주식 투자잔액은 2019년 말 152억달러에서 2024년 말 1161억달러로 약 8배 늘었다. 개인투자자 포트폴리오에서 미국 주식 비중도 2019년 말 58.2%에서 2023년 말 88.5%, 2025년 3월에는 90.4%까지 높아졌다.
해외주식은 더 이상 일부 투자자의 ‘부업 계좌’가 아니다. 가계 자산 안에서 실제 무게를 갖기 시작한 돈이다.
국가데이터처 가계금융복지조사도 배경을 설명한다. 2025년 3월 말 기준 가구 평균 자산은 5억6678만원, 평균 부채는 9534만원이다. 2024년 처분가능소득은 6032만원이었다.
특히 가구주가 40대인 가구의 평균 부채는 1억4325만원으로 전 연령대 중 가장 많았다. 50대도 1억1044만원이었다. 금융부채 보유 가구의 64.3%는 원리금 상환이 부담스럽다고 답했다.
◆생활비 줄여도 안 판다…계좌에 남은 이유
40·50대에게 해외주식 계좌는 단순한 수익률 표가 아니다. 월급은 이번 달을 버티는 돈이다. 카드값, 보험료, 대출이자, 자녀 교육비가 먼저 빠져나간다. 반면 해외주식 계좌는 ‘나중을 위해 남겨둔 돈’에 가깝다.
그래서 쉽게 팔지 못한다. 손실이 나서 못 파는 경우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익이 나도 마찬가지다. 한 번 팔면 다시 달러를 사야 하고, 다시 종목을 골라야 한다. 그 과정 자체가 부담이다.
부동산으로 눈을 돌리기도 쉽지 않다. 수도권·규제지역 주택구입 목적 주택담보대출은 가격 구간별로 한도가 갈린다. 15억원 이하 주택은 6억원, 15억원 초과~25억원 이하 주택은 4억원, 25억원 초과 주택은 2억원으로 묶였다.
집값은 높은데 빌릴 수 있는 돈은 줄었다. 예전처럼 대출을 끌어 상급지로 옮기는 계산도 어려워졌다. 결국 선택지는 좁아진다. 그 안에서 끝까지 남는 게 해외주식 계좌다.
◆왜 하필 미국주식인가
질문은 여기서 한 번 더 이어진다. 왜 미국주식인가.
40·50대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많지 않다. 월급은 정해져 있고, 집값은 혼자 움직일 수 없다. 금리와 환율도 개인이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주식 계좌 안에서는 다르다. 언제 살지, 무엇을 담을지, 얼마나 들고 갈지는 스스로 정한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테슬라 같은 글로벌 기업에 개인이 직접 투자할 수 있다는 점도 크다. S&P500이나 나스닥100을 따라가는 ETF도 익숙해졌다. 예전에는 멀게 느껴졌던 미국 시장이 이제는 스마트폰 안에 들어왔다.
여기에 달러 자산이라는 인식도 붙었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 후반에서 움직이면서 해외주식 계좌는 주식 계좌이면서 동시에 달러 계좌처럼 받아들여졌다. 4월 중순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1474~1490원대에서 움직였다.
이 계좌는 단순한 투자상품이 아니다. 손에 남은 몇 안 되는 선택권이다. 생활비가 넉넉해서 붙잡는 게 아니다. 오히려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팔면 편해지지만…다시 못 살까 두렵다
투자 계좌를 열어보면 현실은 복잡하다. 몇 년 전 사둔 종목이 있고, 조금씩 모은 ETF도 있다. 환율이 오를 때마다 사기 부담스러웠지만, 팔 생각은 더 쉽게 들지 않는다.
당장 팔면 카드값을 막을 수 있다. 생활비 통장에도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불안이 올라온다. 다시 모을 수 있을까. 나중에 더 비싸게 사야 하는 건 아닐까. 노후 준비에서 한 칸 밀려나는 건 아닐까.
40·50대에게 이 고민은 더 무겁다. 은퇴는 멀지 않은데 아직 지출은 크다. 부모 부양과 자녀 교육, 주거비와 대출이자가 동시에 걸려 있다. 이들에게 해외주식 계좌는 ‘돈을 불리는 곳’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겨둔 곳’에 가깝다.
자산관리 업계에서는 이 흐름을 단순한 투자 유행으로만 보지 않는다. 미국 주식 계좌에는 노후자금, 달러자산, 부동산 대체 투자처라는 의미가 겹쳐 있다. 환율과 금리 변동성이 커질수록 일부 투자자는 계좌를 줄이기보다 버티는 쪽을 택한다.
카드값 알림을 넘기고 다시 주식 앱을 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지금 당장 넉넉해서가 아니다. 적어도 이 계좌만큼은,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