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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수록 손해인데 글로벌 공급과잉까지… 다시 벼랑끝 생존경쟁 [심층기획-전쟁특수 끝난 정유·석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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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전 싸게 사들인 원유 등 가치 올라
국내 정유 4사 1분기 영업익 6조 육박
LG화학 등 석화기업들도 흑자 봤지만
종전에 다시 재고 가치 떨어져 손실로

석화기업들, 저렴한 나프타 이미 소진
전쟁중 웃돈 들여 산 것으로 제품 생산
수익성 크게 떨어져 경영 전반 비상등
中·중동기업도 다시 제품 쏟아내 암울
미국·이란 전쟁으로 인한 원유·석유제품 단가 상승 덕분에 특수를 누렸던 정유와 석유화학업계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종전 이후 국제 유가와 석유제품 가격이 빠른 속도로 내려가고 있어서다. 정유업계는 전쟁 중 비싸게 사들였던 원유의 가치가 내려가는 이른바 역래깅(지연) 효과가 부담스럽다. 석유화학업계는 전쟁 여파로 생산량을 줄였던 중국과 중동 기업들이 다시 석유제품을 시장에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치열한 가격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석유화학업계 일각에선 생존을 걱정해야 할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17일 정유·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정유사와 석유화학업체는 올해 1분기에 좋은 실적을 거뒀다. 정유 4사(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의 1분기 합산 영업이익은 6조원에 육박한다. 같은 기간 LG화학과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등 석유화학업체들도 나란히 흑자를 기록하며 오랜 부진을 털어냈다.

 

중동 전쟁이 끝나고 유가가 하락해도 소비 개선, 임금 상승 등으로 물가가 쉽게 떨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한국은행이 17일 전망했다. 한은은 이날 발표한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보고서에서 "앞으로 물가는 상당 기간 높은 상승률을 이어갈 전망"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이날 서울 시내 주유소 모습. 연합뉴스
중동 전쟁이 끝나고 유가가 하락해도 소비 개선, 임금 상승 등으로 물가가 쉽게 떨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한국은행이 17일 전망했다. 한은은 이날 발표한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보고서에서 "앞으로 물가는 상당 기간 높은 상승률을 이어갈 전망"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이날 서울 시내 주유소 모습. 연합뉴스

직전 분기인 지난해 4분기까지만 해도 지속된 적자에 시달리던 이들 업계가 모처럼 얼굴이 핀 데는 중동전쟁 이후 발생한 ‘재고 효과’와 ‘지연 효과’를 톡톡히 봤다. 재고 효과란 전쟁 발발 이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사들여 쌓아둔 원유와 석유화학 원료의 평가 가치가 동반 상승하는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이들 업계는 원료를 미리 사둔 다음 순차적으로 투입해 제품을 만든다. 아직 제품 생산에 사용하지 않은 원료들은 시세에 맞춰 기업의 재고 자산으로 장부상에 기록된다. 예를 들어 전쟁 전 배럴당 70달러로 사들인 원유 가격이 전쟁 기간 130달러로 치솟으면 기업은 60달러의 이익을 얻은 것으로 평가받는 식이다.

재고 효과와 함께 지연 효과도 영향을 미쳤다. 원재료를 구매한 시점과 이를 가공해 제품을 판매하는 시점 간 가격 차이가 벌어져 이익이 발생하는 현상이 지연 효과다.

지난 2월까지 비교적 저렴하게 사들인 원유와 나프타 원료로 생산한 석유와 화학제품 가격이 3월부터 폭등하기 시작하면서 이익이 극대화한 것이다. 특히, 석유화학업체들은 정부가 3월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나프타분해설비(NCC)를 보유한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나프타 수입단가 상승분 차액의 50%를 보조한 덕도 봤다.

문제는 이러한 재고·지연 효과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전쟁 특수가 사라지면 다시 생존위기를 걱정하던 과거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미국과 이란이 극적으로 종전협정을 맺은 이후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일단 국제 유가가 급락세다. 지난 3월12일 배럴당 134.4달러까지 치솟았던 중동산 두바이유 가격은 이달 15일 배럴당 78.9달러로 내려왔다. 전쟁 여파로 부서진 중동 지역 원유 생산 설비가 복구되고,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해협이 완전히 열리면 가격은 더 내려갈 가능성이 크다. 급격한 유가 하락은 정유업계에 ‘역재고 효과’와 ‘역지연 효과’를 일으킨다. 정유회사들은 전쟁 기간 웃돈을 주고 원유를 사들였다. 비싸게 사들인 원유 재고의 가치가 하락하면 이는 고스란히 장부상 손실로 기록된다. 여기에 더해 휘발유와 경유 같은 석유제품 가격이 하락하면 비싼 원유로 만든 석유제품을 싼 가격에 팔아야 한다. 상품을 만들수록 적자를 보는 셈이다.

게다가 2분기 들어서는 수익도 제대로 얻지 못하고 있다. 지난 3월13일 최고가격제 시행 이후 국내 시장 공급가가 제한됐기 때문이다. 최고가격제 시행 기간 동안 정유사들의 손실 합산 규모는 4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정유업계는 일반적으로 석유제품 가격이 비쌀 때 최대한 수익을 벌어들여 손해를 메운다.

 

서울 시내 한 주유소에 가격 정보가 표시돼 있다. 뉴스1
서울 시내 한 주유소에 가격 정보가 표시돼 있다. 뉴스1

그러나 최고가격제로 인해 손실 회복에 제동이 걸렸다. 정부가 손실분을 어느 정도 보전해 주기로 했지만 손실 규모 산정 방식을 두고 업계와 당국의 견해 차이가 커 진통이 예상된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재고·지연 효과 뒤엔 항상 역재고·역지연 효과가 따라와 이익 상승효과가 사라진다”며 “최고가격제 영향이 큰 상황에서 하반기부터 실적이 악화될 가능성이 높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석유화학업계도 비상이다. 올해 초 t당 400달러대에서 거래되던 나프타는 전쟁이 한창이던 4월 1010.5달러까지 치솟았다 이달 들어 700달러대로 내려왔다. 석유화학업계에선 곧 전쟁 이전인 400달러대로 내려갈 것이라 전망한다. 석유화학기업 상당수가 전쟁 발발 전에 사들였던 저렴한 나프타는 이미 소진했다. 현재는 현물 시장에서 웃돈을 얹어 들여온 비싼 나프타를 제품 생산에 투입하고 있다. 이미 석유화학기업의 수익성 지표로 쓰이는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 가격에서 나프타 값을 뺀 차이)는 전쟁 기간 손익분기점(t당 250달러)을 넘어섰지만, 현재 t당 100달러대로 내려앉았다.

그나마 흑자와 적자를 번갈아가며 산업의 생존 자체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정유업계와 달리 석유화학업계는 미국·이란 전쟁 전부터 중국발 석유제품 공급과잉 사태와 중동 국가의 석유화학산업 진출 여파로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상태였다. 정부 주도 아래 지난해부터 총 4곳(대산, 여수1·2호, 울산)의 석유화학 산업단지 설비를 효율화하는 구조조정 작업이 진행됐지만 전쟁 이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산업 전체가 최악의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전쟁으로 잠시 여유가 생긴 것에 불과했다”며 “구조 개혁을 서두르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