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대기업 회장이 딸을 제쳐 두고 조카를 양자로 삼아 기업을 물려주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조선 시대였다면 어떠했을까? 유교 이념에 따른 이와 같은 계승 방식은 너무 당연하게 여겨졌을 터다. 조선 후기 양반 남성 세 명 중 한 명이 양자를 들일 만큼 입양은 흔한 관습이었다.
유교 종법제는 적장자에게 제사와 가계 계승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아들이 태어날 확률은 절반에 불과했다. 또 높은 영유아 사망률은 가계 계승의 불확실성을 더욱 높였다. 서자가 가계를 이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들은 과거 응시에 제한이 있었다.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면, 가문의 몰락은 예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 양반들이 선택한 가장 유교적이며, 합리적인 해결책은 ‘입양’이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정실 아내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했을 경우, 관에 알린 다음 동종의 지자를 세워 뒤를 잇게 할 수 있다는 계후(繼後·양자로 제사를 이음)를 명시하고 있다. 원칙적으로는 ‘동종의 지자’, 다시 말해서 부계 친족 가운데 항렬이 어긋나지 않는, 장남이 아닌 자를 양자로 들여야 했다. 이로써 가문 내 분쟁을 막고 친밀감을 쌓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여기에 조선 특유의 가문의식이 보태지며, 형제나 가까운 사촌의 아들을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늘 가까운 핏줄을 고집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위상이나 정치적 이유로 10촌 이상 먼 친척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가문의 위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이른바 출세한 자제가 많았다. 이들이 가장인 집안은 자기 아들을 가난한 친척에게 양자로 보낼 이유가 없었다.
정조 때 김종순 집안은 19촌이나 되는 먼 조카를 데려와 계후했다. 가까운 인척인 6촌 김조순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양쪽 집의 위상이 너무도 달랐다. 김종순은 19세에 사망했으나, 김조순은 21세에 급제해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양주 조씨 가문은 더 먼 친족 자제를 양자로 들였다. 조씨 가문의 친족 내에서 정치적 견해가 갈리자, 갈등을 피하고자 21촌이나 먼 친족 자제를 양자로 삼았다. 조씨 가문의 양자 가운데 먼 촌수는 무려 35촌에 달했다.
먼 친족의 자제를 양자로 들일 때는 아이의 재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한 김상헌의 가문은 후대에 계후가 필요하자, 11촌 조카 김건순을 입양했다. 김건순은 아주 어려서부터 천재로 이름을 알렸다.
3품 이상의 고위직을 배출한 가문의 족보를 보면, 이처럼 먼 친척의 자제를 입양한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학자 성만징은 이를 두고, 오직 자제의 현명함만을 본다면 이는 인정과 도리에 어긋난다며 비판했다. 성만징이 보기에 이런 식의 계후는 조상 제사를 끊이지 않게 받든다는 올바른 도리에 어긋났다. 인정이 아닌 능력이 기준이 되는, 현대의 스카우트와 다를 바 없는 게 당시 입양의 풍속도였다.
물론, 냉혹하다면 냉혹한 처사겠다. 그러나 당시는 전략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가문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문신이나 무신이 되는 것만이 가문을 유지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고, 문과든 무과든 과거 준비에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었다. 문과를 준비한다면 글쓰기, 무과를 준비한다면 활쏘기를 가르칠 과외 선생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양쪽 집에서 동의한다면,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한 생부모는 똑똑한 아들의 재능을 썩히지 않을 수 있었고, 양부모는 제사는 물론, 과거 급제도 바랄 수 있었다. 양자가 과거에 급제하면, 당사자 개인은 물론, 생부모와 양부모 그리고 가문에도 큰 이득이었다. 이처럼 계후는 혈연 집단 내 이해가 맞물리며, 계속 유지되었다. 1970년대까지도 우리 주변에서 계후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이유다.
다만, 아이의 총명함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낮출 뿐이었다. 11촌 김건순의 입양은 미래를 염두에 두고 그의 명석한 두뇌를 높이 산 결정이었다. 계산은 빗나갔다. 김건순은 서학에 빠져들었고 끝내 천주교 신자가 되어 순교했다. 명석한 두뇌로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그 총명함이 도리어 위기가 되었던 것이다.
가문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능력 있는 유전자를 찾아 먼 촌수도 마다하지 않았던 조선의 양반들. 그들의 입양 기록은 혈연이라는 명분 뒤에 가려진, 가문의 명예와 성공을 향한 냉혹한 생존 전략이었다.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문화총서 11)
홍현성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위원

